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시대의 여류 소설가인 조르주 상드(George Sand)의 본명은 아망틴 오로르 루실 뒤팽(Amantine Aurore Lucile Dupin)이며, 4세 때 아버지를 여읜 뒤로 할머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의 할머니는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었는데, 그 덕분에 조르주 상드도 오르간, 하프, 클라비코드 등의 악기를 배우고 라틴어, 희랍어, 수학, 그림, 역사, 문학 등 다양한 학문을 익히며 자라났다.
George Sand(1804~1876)
18세 때 할머니를 여읜 상드는 아버지의 친구인 뒤프레시스 댁에 머물면서 음악회나 연극 모임 등에 자주 참석하다가 지방의 귀족인 뒤드방(Dudevand) 남작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데다가, 자신과는 달리 '문학'과 '음악'에 관심이 없으며, 기질 차이가 심한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이혼한 뒤 파리로 올라왔다.
그 후, 생계를 위해 잡다한 일을 하던 그녀는 친구의 권유로 쓴 소설로 유명해지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문필 활동을 하면서 이름을 '조르주 상드'로 바꾼 그녀는 평소에 '남장'을 즐겼으며, 남자들처럼 말을 타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그들과 같이 문학이나 혁명에 관해 논하기도 했다.
조르주 상드는 당대의 유명 예술가나 저명 인사인 쇼팽, 뮈세, 하이네,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플로베르, 보들레르, 톨스토이, 빅토르 위고, 마르크스, 알렉상드르 뒤마 등과 교류하면서 사랑과 우정을 나눴다.
그 중 작곡가인 '쇼팽'과는 10년이나 동거했다. 조르주 상드는 쇼팽을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을 느꼈지만, 보수적인 쇼팽은 진보적이고 자유분방한 성향의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쇼팽의 병(결핵)으로 약혼녀와의 약혼이 깨졌을 때 조르주 상드가 진심으로 위로해 줌으로써 그 둘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폐결핵에 걸린 쇼팽(Chopin)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 엄마처럼, 연인처럼 잘 감싸주었다. 결국 조르주 상드를 찾아온 그녀의 아이들 문제로 갈등을 겪으며 그 둘은 헤어지게 되었지만, 쇼팽은 상드로부터 모성애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던 그 시기동안 주옥같은 곡들을 많이 남겼다.
평소 사교 모임이나 토론장 등에 '연미복에 중절 모자 & 파이프를 문 남장 차림'을 한 채 참석하고, 기질 자체도 강했던 조르주 상드는 자신보다 약하거나 여성스러운 성향이 있는 남자 예술가들을 만나기 원했다. 그녀는 주로 자신이 남자들을 리드했는데, 사랑하는 남자들을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포용하고 돌보는 데에서 큰 만족감을 느꼈다고 한다.
조르주 상드(George Sand)가 남장을 했던 것은 당시 '여성이란 이유로 차별 당해야 하는 사회적 불합리함'에 대해 항의하고, 남성 예술인과 동등하게 대우받기 원했던 그녀 나름의 의사 표시였다.
그녀는 평생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영혼의 동반자'를 찾아다녔으며, 사랑하는 그 순간 만큼은 온 열정을 다 바쳐 뜨겁게 사랑했다. 당시 조르주 상드와 사랑을 나눴던 예술가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서 훌륭한 창작물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연애사에 묻힌 감이 있지만, 조르주 상드(George Sand)는 스스로도 부지런히 창작 활동을 하여 총 120편이 넘는 문학 작품을 남겼다. 또한, 민중(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하거나 불평등한 대우를 받던 여성의 입장에 관해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한 여성 해방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열심히 창작열을 불태운 문학가로서의 조르주 상드는 1기엔 주로 자전적인 연애 소설을 썼고, 2기 때는 인도주의적인 사회 소설, 3기에는 전원 소설, 4기엔 무르익은 필치로 보수주의적 소설과 희곡 등을 집필했다. 대표작으로 <앵디아나(Indiana)>, <콩쉬엘로(Consuelo)>, <마(魔)의 늪(La mare au diable)>, 회상록 <내 생애의 역사(Histoire de ma vie)> 등이 있다..
18세 때 할머니를 여읜 상드는 아버지의 친구인 뒤프레시스 댁에 머물면서 음악회나 연극 모임 등에 자주 참석하다가 지방의 귀족인 뒤드방(Dudevand) 남작과 만나 결혼했다. 하지만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데다가, 자신과는 달리 '문학'과 '음악'에 관심이 없으며, 기질 차이가 심한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되고, 결국 이혼한 뒤 파리로 올라왔다.
'남장 차림'을 한 조르주 상드
그 후, 생계를 위해 잡다한 일을 하던 그녀는 친구의 권유로 쓴 소설로 유명해지면서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문필 활동을 하면서 이름을 '조르주 상드'로 바꾼 그녀는 평소에 '남장'을 즐겼으며, 남자들처럼 말을 타거나 담배를 피우면서 그들과 같이 문학이나 혁명에 관해 논하기도 했다.
조르주 상드는 당대의 유명 예술가나 저명 인사인 쇼팽, 뮈세, 하이네,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플로베르, 보들레르, 톨스토이, 빅토르 위고, 마르크스, 알렉상드르 뒤마 등과 교류하면서 사랑과 우정을 나눴다.
그 중 작곡가인 '쇼팽'과는 10년이나 동거했다. 조르주 상드는 쇼팽을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을 느꼈지만, 보수적인 쇼팽은 진보적이고 자유분방한 성향의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쇼팽의 병(결핵)으로 약혼녀와의 약혼이 깨졌을 때 조르주 상드가 진심으로 위로해 줌으로써 그 둘은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폐결핵에 걸린 쇼팽(Chopin)을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 엄마처럼, 연인처럼 잘 감싸주었다. 결국 조르주 상드를 찾아온 그녀의 아이들 문제로 갈등을 겪으며 그 둘은 헤어지게 되었지만, 쇼팽은 상드로부터 모성애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던 그 시기동안 주옥같은 곡들을 많이 남겼다.
평소 사교 모임이나 토론장 등에 '연미복에 중절 모자 & 파이프를 문 남장 차림'을 한 채 참석하고, 기질 자체도 강했던 조르주 상드는 자신보다 약하거나 여성스러운 성향이 있는 남자 예술가들을 만나기 원했다. 그녀는 주로 자신이 남자들을 리드했는데, 사랑하는 남자들을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포용하고 돌보는 데에서 큰 만족감을 느꼈다고 한다.
조르주 상드(George Sand)가 남장을 했던 것은 당시 '여성이란 이유로 차별 당해야 하는 사회적 불합리함'에 대해 항의하고, 남성 예술인과 동등하게 대우받기 원했던 그녀 나름의 의사 표시였다.
그녀는 평생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영혼의 동반자'를 찾아다녔으며, 사랑하는 그 순간 만큼은 온 열정을 다 바쳐 뜨겁게 사랑했다. 당시 조르주 상드와 사랑을 나눴던 예술가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받아서 훌륭한 창작물을 많이 남기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연애사에 묻힌 감이 있지만, 조르주 상드(George Sand)는 스스로도 부지런히 창작 활동을 하여 총 120편이 넘는 문학 작품을 남겼다. 또한, 민중(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사회 문제에 적극 참여하거나 불평등한 대우를 받던 여성의 입장에 관해 끊임없이 문제 제기를 한 여성 해방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열심히 창작열을 불태운 문학가로서의 조르주 상드는 1기엔 주로 자전적인 연애 소설을 썼고, 2기 때는 인도주의적인 사회 소설, 3기에는 전원 소설, 4기엔 무르익은 필치로 보수주의적 소설과 희곡 등을 집필했다. 대표작으로 <앵디아나(Indiana)>, <콩쉬엘로(Consuelo)>, <마(魔)의 늪(La mare au diable)>, 회상록 <내 생애의 역사(Histoire de ma vie)>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