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가정부와 사랑에 빠진 화가 '렘브란트'

타라 2013. 10. 26. 08:07
17세기 네덜란드 화가로 '종교화'나 '초상화'를 많이 그린 렘브란트(Rembrandt)는 그 이름만으로 무척 유명한 예술가이다. 뛰어난 작품을 많이 남긴 그는 한 때 풍족한 생활을 누리기도 했으나, 그 말년의 삶은 심히 비참했다고 전해진다. 20대 후반에 아내 '사스키아'를 얻은 렘브란트는 그 시기에 무척 잘 나갔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도 얻었지만, 얼마 못 가 사스키아는 죽게 된다.

부인 사스키아를 무릎에 앉힌 렘브란트의 자화상

그 후 렘브란트가 아들 '티투스'를 양육하기 위해 과부인 '헤르트헤 다르크'를 보모로 고용했고 나중엔 그녀와 사실혼 관계에 들어갔으나, 렘브란트 쪽에서 '결혼' 생각은 없었다. '아들의 유모'와의 동거로 사회적 명성에서 흠집이 나고 헤르트헤와 이런 저런 갈등을 겪던 렘브란트는 결국 그녀와 결별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헤르트헤가 '혼인 불이행'에 대한 소송을 걸었고, 법원에선 렘브란트(Rembrandt)에게 '매년 헤르트헤에게 별거 수당을 지불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때부터 서서히 '경제력'에 타격 입고 운이 기울기 시작한 렘브란트.. 그 다음 '보모 겸 가정부'인 '헨드리키에 스토펠스'와 또 사랑에 빠졌고 그녀와의 사이에서 딸도 낳았지만, 죽을 때까지 '정식 결혼'은 하지 않았다. 렘브란트가 헤르트헤나 헨드리키에와 재혼하지 않은 것은 아들 '티투스'에게 물려줄 유산 때문이었던 듯하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많은 재산을 갖고 있었던 아내 '사스키아'가 죽기 전, 만일 자신이 죽으면 '재혼하지 말고, 그 유산을 아들 티투스에게 넘기라'는 유언을 남겼으므로...

렘브란트의 작품 활동에 큰 영감을 준 여인, 헨드리키에 스토펠스


비록 정식 혼인은 하지 않았지만, 렘브란트를 진심으로 사랑한 '헨드리키에 스토펠스(Hendrickje Stoffels)'는 그의 아들 '티투스'를 정성껏 양육했고 때론 렘브란트의 그림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면서 정성껏 내조한 좋은 반려자였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는 정식 혼인하지 않은 이들의 관계를 '불륜'으로 매도했으며, 헨드리키에는 여러 차례 교회 재판소에 불려나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렘브란트는 부지런히 작품 활동에 매진했으나, 두 가정부와 얽힌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서서히 가세가 기울었고 50세 되던 해에 '파산 선고'를 받게 되었다. 이후 렘브란트(Rembrandt)는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면서도 훌륭한 작품을 계속 발표했지만, 56세 때 헨드리키에가 세상을 떠나고 그로부터 6년 뒤에 아들 '티투스'마저 저 세상으로 가 버리자 외롭고 비참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젊은 시절'엔 화려한 나날을 보내기도 했었지만 '말년' 들어 가난하고 고독한 삶을 이어가야만 했던 렘브란트는 아들이 죽은 다음 해, 임종을 지켜보는 이도 없는 가운데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화가 렘브란트, 젊은 시절의 자화상

그렇게 비참하게 지냈던 말년에 '주옥같은 작품'을 쏟아 내었고 후대에 '위대한 화가'로 남게 되었으나, 결국 초라한 집에서 불쌍하게 죽어가야만 했던 렘브란트(Rembrandt)의 삶을 생각하니 마음이 참 짠하다. 간혹 너무나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여인과의 사랑 보다는 '자기 작품 세계'에 푹 빠져 지내는 예술가들도 있지만,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의 경우엔 옆에서 자신을 지탱해줄 수 있는 '여인(동반자)'이 있어야 마음 편히 작품 활동 할 수 있는 화가였던 것 같다.

그랬던 그가 젊은 나이에 부인을 떠나보내고, 그 뒤에 같이 살았던 (아들의) 보모들과 '정식 재혼'할 수 없는 채로 이런 저런 송사와 사회적 비난에 시달려야 했던 사실이 무척 안타깝게 느껴진다. 아울러, 당대의 사람들이 렘브란트(Rembrandt) 예술성의 뛰어남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