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의 아버지는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된 우범선이었다. 당시의 우범선은 속아서 그 일의 훈련대 대장으로 동원되었고, (러시아 세력 집권 후)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동경 제국 대학을 나온 우장춘은 일본 농림성에 들어가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 나갔으며 '눈에 띄는 연구 결과'로 일본에서 뿐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인정을 받았고, 도쿄 제국 대학에서 농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우장춘은 어느 날, 일본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임된다. 조선에서의 그는 역적의 가족일 뿐이었지만, 일본에서도 조선인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차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장춘은 해임된 후 지방에서 재취업을 한 뒤 연구 활동에 힘썼다. 1947년 ('세계적인 육종학의 권위자'였던 그의 명성이 한국에까지 알려졌는지)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 '우장춘 환국 추진 운동'이 일어났고, 해방된 조선(대한 민국)에선 거액의 돈을 들여 뛰어난 학자인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애썼다. 한국에서 배신자(역적)의 가족으로 낙인 찍힌 줄 알았건만, 의외로 조국에서 자신을 불러들이려 하자 감격한 우장춘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우장춘은 스카웃 비용으로 받은 돈을 자기 가족을 위해 쓰는 대신 국내에서 쓸 종자를 구입하는 등 '연구 비용'으로 사용했고, 우량 종자 개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우장춘 박사는 벼, 무, 고추, 양파, 토마토, 오이, 참외, 수박 등 많은 품종들에서 외국 농작물을 뛰어넘는 '우량 종자'를 개발했고, 그 덕분에 당시의 한국 국민들은 점차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각광 받고 있는 '세계적인 품질의 제주 감귤'도 우장춘 박사가 그 재배 기술을 연구하여 널리 알린 것이다. 또한, 바이러스에 약하여 번번히 재배에 실패했던 '강원도 감자'도 우장춘 박사로 인하여 튼실한 우수 종자로 바뀐 것이라 한다.
그는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의 제주 감귤 산업 뿐 아니라, 원예 산업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다. 우장춘 박사는 한평생 연구에 몰두하면서, 실질적으로 한국의 농작물 산업과 경제를 일으키는 데에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한국에 거주하게 된 우장춘은 굳이 안 가도 되는 군대까지 자진해서 다녀왔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가들과 과학자들 중엔, 그가 일본에서 왔고 한국말이 좀 서투르단 이유로 무시하면서 싫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또한, 이승만 정권에선 그의 출국을 금지시켜서 우장춘은 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철저하게 학자 타입이었던 우장춘 박사는 병에 걸려 투병하는 와중에도 '보다 우수한 벼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계속해서 연구에 몰두했다. 죽기 하루 전날,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 포장(상)'을 받은 우장춘 박사는 조국이 자신을 인정해 준 것에 대해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외국의 천재 음악가나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명 작가들 못지 않게 '당시 힘든 삶에 처해졌던 한국인들이 실질적으로 먹고 사는 데'에 많은 기여를 한 '천재 과학자 우장춘'은 일본에선 '일본'에서대로, 한국에선 '한국'에서대로 많은 차별과 멸시 & 냉대를 받은 인물이었다.
우리 나라에선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인물'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람은 따로 있고 우장춘 박사는 그보다 더 굵직굵직한 업적을 많이 남긴 과학자이다. 그럼에도, 그의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장춘의 재능'을 철저히 이용해 먹은 이승만 정권에서 그의 빼어난 업적에 대해선 기록으로 남기는 걸 꺼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인의 피가 섞인 우장춘은 뛰어난 두뇌를 지닌 '과학 천재'였고, 전후(한국 전쟁 후)에 굶주림에 허덕이던 한국인들이 제대로 먹고 살 수 있게끔 농업 분야에서 큰 업적을 세운 인물이었음에도, 살아 생전엔 양 쪽 부모의 나라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던 '비운의 천재'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이라도, 좋은 자리도 일부러 마다하고 일평생 '연구'에 몰두하면서 (자기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한 우장춘 박사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우장춘 박사(1898~1959)
일본으로 건너 간 우범선은 일본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그 중 첫째 아들이 우장춘이다. 그가 6세였을 때 아버지 우범선은 대한제국 측에서 보낸 조선인 자객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 뒤 남은 가족은 비참한 삶을 살아야만 했고, 우장춘은 고아원에 보내진다. '오리지널 일본인 원생들' 속에서 '조선인의 피가 섞인 장춘'은 심한 '이지메'를 당하게 되지만, 결코 삐뚤어지지 않고 훗날 훌륭한 사람이 되기로 스스로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그 후, 열심히 돈을 번 그의 어머니가 다시 고아원에서 우장춘을 데려왔기에 그는 정상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동경 제국 대학을 나온 우장춘은 일본 농림성에 들어가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 나갔으며 '눈에 띄는 연구 결과'로 일본에서 뿐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인정을 받았고, 도쿄 제국 대학에서 농학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우장춘은 어느 날, 일본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해임된다. 조선에서의 그는 역적의 가족일 뿐이었지만, 일본에서도 조선인의 핏줄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차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장춘은 해임된 후 지방에서 재취업을 한 뒤 연구 활동에 힘썼다. 1947년 ('세계적인 육종학의 권위자'였던 그의 명성이 한국에까지 알려졌는지) 국내 지식인들 사이에 '우장춘 환국 추진 운동'이 일어났고, 해방된 조선(대한 민국)에선 거액의 돈을 들여 뛰어난 학자인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애썼다. 한국에서 배신자(역적)의 가족으로 낙인 찍힌 줄 알았건만, 의외로 조국에서 자신을 불러들이려 하자 감격한 우장춘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우장춘은 스카웃 비용으로 받은 돈을 자기 가족을 위해 쓰는 대신 국내에서 쓸 종자를 구입하는 등 '연구 비용'으로 사용했고, 우량 종자 개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우장춘 박사는 벼, 무, 고추, 양파, 토마토, 오이, 참외, 수박 등 많은 품종들에서 외국 농작물을 뛰어넘는 '우량 종자'를 개발했고, 그 덕분에 당시의 한국 국민들은 점차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각광 받고 있는 '세계적인 품질의 제주 감귤'도 우장춘 박사가 그 재배 기술을 연구하여 널리 알린 것이다. 또한, 바이러스에 약하여 번번히 재배에 실패했던 '강원도 감자'도 우장춘 박사로 인하여 튼실한 우수 종자로 바뀐 것이라 한다.
그는 제주도와 남해안 일대의 제주 감귤 산업 뿐 아니라, 원예 산업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다. 우장춘 박사는 한평생 연구에 몰두하면서, 실질적으로 한국의 농작물 산업과 경제를 일으키는 데에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이다. 한국에 거주하게 된 우장춘은 굳이 안 가도 되는 군대까지 자진해서 다녀왔다.
하지만 당시의 정치가들과 과학자들 중엔, 그가 일본에서 왔고 한국말이 좀 서투르단 이유로 무시하면서 싫어하는 이들이 많았다. 또한, 이승만 정권에선 그의 출국을 금지시켜서 우장춘은 친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철저하게 학자 타입이었던 우장춘 박사는 병에 걸려 투병하는 와중에도 '보다 우수한 벼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 계속해서 연구에 몰두했다. 죽기 하루 전날,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 포장(상)'을 받은 우장춘 박사는 조국이 자신을 인정해 준 것에 대해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외국의 천재 음악가나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명 작가들 못지 않게 '당시 힘든 삶에 처해졌던 한국인들이 실질적으로 먹고 사는 데'에 많은 기여를 한 '천재 과학자 우장춘'은 일본에선 '일본'에서대로, 한국에선 '한국'에서대로 많은 차별과 멸시 & 냉대를 받은 인물이었다.
우리 나라에선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인물' 정도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사람은 따로 있고 우장춘 박사는 그보다 더 굵직굵직한 업적을 많이 남긴 과학자이다. 그럼에도, 그의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우장춘의 재능'을 철저히 이용해 먹은 이승만 정권에서 그의 빼어난 업적에 대해선 기록으로 남기는 걸 꺼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인의 피가 섞인 우장춘은 뛰어난 두뇌를 지닌 '과학 천재'였고, 전후(한국 전쟁 후)에 굶주림에 허덕이던 한국인들이 제대로 먹고 살 수 있게끔 농업 분야에서 큰 업적을 세운 인물이었음에도, 살아 생전엔 양 쪽 부모의 나라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던 '비운의 천재'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이라도, 좋은 자리도 일부러 마다하고 일평생 '연구'에 몰두하면서 (자기 아버지의 나라인) 한국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한 우장춘 박사의 업적이 제대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