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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적 재능과 학식을 겸비한 왕의 여자 : 퐁파두르 부인

타라 2010. 8. 19. 22:57
퐁파두르 후작 부인(Marquise de Pompadour) : 18세기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5세의 정부로, 4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20여 년간 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퐁파두르 부인'은 매력적인 미모와 풍부한 학식, 예술적 재능을 두루 겸비한 능력있는 여성이었다.

 

Marquise de Pompadour
(1721~1764)


당시의 마담 드 퐁파두르(Madame de Pompadour)는 계몽 철학에도 지대한 관심을 가져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공동으로 편찬한 <백과전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로코코 양식의 확립과 학예 보호 등 프랑스 예술/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인물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에 걸친 사치스런 생활과 국가 재정 낭비는 훗날 '프랑스 혁명'을 유발한 원인 중 하나였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미모와 지성, 특유의 총명함으로 루이 15세의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여인

퐁파두르 부인의 원래 이름은 잔느 푸아송(Jeanne Poisson)이다. 평소 화려한 궁정 생활을 동경했던 그녀는 루이 15세의 눈에 띄어 '후작 부인'의 칭호를 얻은 뒤 그의 애첩으로 20년 간 살았으며, 특유의 총명함으로 왕의 신뢰를 얻어 프랑스의 정치에 관여하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왕 '루이 15세'와 그의 정부 '퐁파두르 후작 부인'

당시 연적이라 할 수 있는 왕비의 측근조차 '퐁파두르 부인은 내가 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중 하나'라고 말했을 만큼 외모가 뛰어난 그녀였지만, 그에 더하여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지닌 사려깊은 마음씨와 예술적 재능, 풍부한 학식과 교양 또한 왕의 총애를 받게 된 한 요인이었다.

9세 정도 되었을 무렵 한 점쟁이는 그녀가 장차 '왕의 마음을 사로잡는 여인이 될 것'이란 예언을 했고, 그 말을 믿은 그녀의 어머니는 예술과 학문에 관련된 각종 전문 지식을 연마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었다. 20세 때 서열이 낮은 한 귀족과 결혼한 퐁파두르 부인은 문학 살롱을 열게 되었는데, 볼테르 등 당대의 위대한 작가와 철학자들이 그녀의 살롱에 자주 드나들었고, 의도적인 노력으로 루이 15세와 자주 마주치게 된 그녀는 결국 왕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정부가 되었다.


로코코 양식의 확립 : 문학, 인테리어, 음악, 미술 등 예술 전반에 대한 깊은 안목


퐁파두르 부인은 원래 '평민' 출신이었으나, 루이 15세는 그녀에게 '후작 부인'이란 작위를 내려 '귀족'으로 격상시켜 주었다. 마담 퐁파두르는 어떤 주제가 주어지든 왕과 충분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대화가 시들해질 무렵이면 피아노를 치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 부르기도 하고, 개인 극장을 만들어 자신이 직접 감독한 공연을 열기도 하였다.


화려하고 섬세한 '로코코 양식'의 중심에 서 있던 퐁파두르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더불어 18C 유럽의 패션 리더였고, 그녀의 스타일은 당시 프랑스 사교계의 유행이 되기도 하였다. 예술 전반에 걸쳐 뛰어난 안목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가구, 도자기, 보석, 그림, 책 등 많은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었으며 음악과 미술에 조예가 깊어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했다.

당시엔 보수적인 정치가나 신학자들에 의해 '백과 사전'의 판매가 금지되었던 시기였는데, 퐁파두르 부인의 기지로 인하여 프랑스 내에서 백과 사전의 판매가 허용되었다고 한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Marquise de Pompadour)은 늘 책을 가까이 하였으며, 악기 클라비코드를 수준급으로 연주하고, 뛰어난 그림 실력에, 원예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보석 디자인 능력에, 특유의 유머 감각까지 겸비한 다재다능한 여성이었으며, 평소 왕의 비서 실장처럼 그의 일을 보좌하기도 하였다.

그녀의 예술적 취미는 프랑스의 문예를 부흥시키는 데 큰 힘이 되었으며, 극장이나 소극장의 건립은 물론 당대의 예술가들에 대한 후원도 아끼지 않았다. 평소 냉대하에 시달리던 퐁파두르 부인은 비데를 고안하여 사용하기도 했는데, 당시의 비데는 지금과 같은 분수식이 아닌 뒷물용 대야에 청결 소독제와 향수를 넣어 사용한 것이었고, 그것이 점차 발전하여 오늘날의 비데가 되었다고 한다.


시대를 풍미한 여성 : '시기와 암투'의 궁궐 속에서 세계사를 움직인 숨은 주인공

퐁파두르 후작 부인(Marquise de Pompadour)은 새로이 성장하던 프로이센을 견제하기 위해 평소 앙숙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는 '외교 혁명'을 이끌어 내었는데, 그 외교 혁명은 오스트리아의 공주였던 마리 앙뚜와네뜨와 루이 16세가 정략 결혼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루이 15세는 나중엔 국정을 그녀에게 맡기고 주색을 일삼는 등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왕에게서 낳은 사생아만도 몇 십 여명에 달한다고 한다. '
왕의 애첩'들의 질투와 음모가 난무하던 궁정 생활 속에서, 퐁파두르 부인에 대한 시기와 악평도 많았었다. 그에 따른 스트레스와 매일 밤 계속되는 연회 등 지친 궁 생활로 인해 퐁파두르 부인은 결국 병을 얻어 4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녀의 사인(死因)은 왕이 지니고 있던 비너스의 병(성병)이 옮겨져서 그리 되었단 설도 있고, 폐렴으로 사망했단 설도 있다.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죽은 뒤에도 루이 15세는 내내 그녀를 그리워했으며, 장례식 때는 '정식 부인'이 아니어서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외투와 모자도 쓰지 않은 채 계속 발코니에 서서 찬바람을 맞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녀의 사망 후 '퐁파두르 부인의 적들'은 그녀 때문에 프랑스가 7년 전쟁에 관여했고, 덕분에 큰 손실을 입게 되었다며 엄청난 비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녀의 '외교 혁명'이 7년 전쟁의 실패로써 수포로 돌아갔고, 오랜 사치 생활 끝에 소모한 막대한 낭비 등이 훗날 '프랑스 혁명'을 유발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으나, 예술과 학문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많은 저명한 작가를 후원해 '로코코 양식'을 창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퐁파두르 후작 부인은 '역사를 움직인 역대 왕의 정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