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극적이거나 식상한 소재, 혹은 달달한 멜로로 칠갑한 트렌디 드라마=시청률 잘 나오는 드라마
한국 드라마의 방향은 어떤 면에선 분명 진보하고 있고, 어떤 면에선 퇴보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다. 과연 누구의 잘못일까? 원래, 80년대, 90년대의 한국 드라마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소재도 다양했고, 구성도 촘촘했고, 매 회마다 한 회를 관통하는 뚜렷한 스토리도 있었고... 그 때는 아무나 드라마 작가 되기 힘든 시절이었는지.. 나름 깊이 있는 철학이 있고, 삶에 대한 체험이 묻어나고,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대놓고 드러내진 않지만) 삶에 대한 어떤..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그런 좋은 드라마들이 많았었다. 그런 드라마들이 재미가 없거나 대중성(시청률)이 없었냐 하면.. 결코! 그렇지도 않았다는 것-
예전에는.. 깊이도 있고, 구성도 탄탄하고, 뚜렷한 스토리도 있고, 진정성도 넘치고, 시청률까지 잘 나오는 그런 드라마들이 참 많았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누군가의 음모인지는 몰라도 "너무 깊이 있고 심오한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어려워서 안봐요~" 라는 터무니 없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도 거기에 은연중에 세뇌 당했던 듯하다. 헌데, 옛날 기억을 떠올려 보면 '전혀 그렇지 않거든요~?'인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시청자들이 어려워서 잘 안 보는 그런 드라마는 '깊이'만 있고 '재미'가 없었겠지- 하지만 깊이 있는 드라마가 모두 재미 없지는 않다. 예전에는 분명 '깊이'도 있고, '재미'도 있는 드라마들이 훨씬 많았으니까... 다만, 요즘 드라마 작가들은 실력이 없는지.. 이거 되면 저거 안 되고, 저거 되면 이거 안 되는 식이라서.. 요즘 드라마 작가들의 전반적인 역량이 딸려서 전체 수준까지 평균 이하로 깎아 먹고 있다는 것, 그게 문제인 거다.)
개연성은 분실하고, 스토리는 상실하고, 그럴 듯한 화면으로 1시간을 때우는 요즘 드라마..
예전의 한국 드라마는 오랜 시간 정성 들여 푹~ 고운 곰국 같은 그런 느낌이 있었는데, 요즘의 한국 드라마는 갈수록 CF화 되어지고, 인스턴트화 되어가는 것 같다. 내용은 없이, 그럴 듯한 그림 몇 개 집어 넣어서 1시간을 때우고, 구성과 스토리는 출렁출렁~ 제멋대로 널을 뛰며, 아침에 한 말을 저녁에 뒤집고, 진짜 설명해줘야 할 내용은 대충 생략해~에다가 중간중간, 핵심 스토리의 맥을 끊어놓는 뜬금없는 장면으로 뽀샤시 그럴 듯한 화면 만들어 때워 버리면 그게 재미있는 줄로 착각하는 드라마~ 혹시라도.. 그런 드라마가 시청률이 잘 나온다면 그건.. 그 시간에 딱히 볼 게 없거나 시간이 남아 돌아서, 혹은 요즘 드라마 중엔 별달리 볼 만한 드라마가 없어서일게다. 왜냐하면, 선택의 여지가 없기에...
우리 나라 역대 시청률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는 드라마들을 살펴보면, 그 작품들을 관통하고 있는 소재나 주제는 대체로.. 진한 가족애, 역사를 통해 드러나는 시대 정신, 사회 풍자,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올바른 자세.. 뭐, 이런 걸 다룬 드라마들이 주를 이룬다. 아직까지 역대 한국 드라마 전체 시청률, 부동의 1위는 조소혜 작가의 <첫사랑>(1997년 작)인데.. 시청률 60%가 넘은 드라마로, 앞으로도 그 기록이 쉽게 깨어질 것 같지는 않다.(찾아 보면, 그 이전 드라마들 중에 더 히트 친 드라마도 분명 있을텐데.. 그 땐 본격적으로 시청률 집계 작업을 하기 전이었는지,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고 있다..)
난, 조소혜 작가의 그 이전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도 참 재미있게 보았다. 그 드라마도 캐스팅이 참 화려했고, 등장 인물이 꽤 많았었는데 그 각각의 등장 인물 스토리를 얘는 얘대로, 쟤는 쟤대로.. 재미나게 풀어내면서도 중간에 스토리가 꼬이거나, 각 캐릭터들의 사랑 놀이로만 때우거나, 소재가 고갈되거나 하지 않고, 모든 등장 인물의 스토리가 씨줄과 날줄로 잘 엮였던 드라마로 기억된다.(이야기 풀어 나가다가 막히면, 스토리는 없이 뽀샤시 화면에 등장 인물의 달달한 로맨스로 칠갑을 하거나 막장 설정으로 충격 요법을 쓰는 몇몇 요즘 드라마와는 다르게...)
시청률 1위일 수밖에 없는 이유 : 가장 한국적인 정서, 한국적인 미덕 '가족애'
예전 한국 드라마 중에는 기본 스토리가 탄탄했던 드라마가 참 많았다. 전체를 관통하는 일정한 스토리가 매 회 촘촘한 흐름으로 이어지기에, 중간에 맥이 끊어지거나 긴장감이 늦춰지지 않고 중반부 이후 더더욱 탄력을 받게 되는 그런 드라마들이... 요즘은, 초반엔 잘 나가다가 어느 순간 흐름이 늘어지거나 맥이 끊어지는 드라마들이 난무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그리고, 예전에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들은 나름 극 전체를 관통하는 특정 정서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조소혜 작가의 <첫사랑>, 이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인데...
드라마 <첫사랑>이 표면적으로 다루고 있는 소재는 '집안의 반대와 주변 인물들의 방해로 인한 주인공들 간의 이루어지기 힘든 첫사랑'.. 이지만, 그 안에 은근히 흐르고 있는 정서는.. 대한민국 시청자들에게 먹힐 수밖에 없는, 가장 한국적인 미덕.. '가족애'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3명의 주인공들 중 2명에 해당하는 성찬혁과 성찬우는 '가난하지만 인자한 홀아버지'와 '다소 모자란 듯하지만 착한 누나'와 함께 가족을 이루고 살아가는 형제지간인데, 그들이 보여주는 '형제애'와 '가족애'가 이 극의 또 다른 소재이자 주제인 셈..
사실 '부잣집 고명딸과 가난한 집 출신 아들의 집안 반대에 부딪힌 사랑'이라는 소재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고 모든 사람들이 쉽게 체험하게 되거나 공감할 만한 내용은 아닌 진부한 소재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전 국민적인 공감과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 밑에 깔려있는 '잔잔한 형제애와 가족애'가 한 몫 했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보편 타당하게 공감하는 한국적인 미덕을 제시했다는 것-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고 매사 정에 치중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개인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서양인'들에 비해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게 한국인의 장점이기도 하다.
모든 사람들이 보편 타당하게 공감할 수 있는 바람직한 가족상 제시~
비교적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고방식'이 지배적인 서양인과 달리, 한국 사람은 단일 민족이라 유독 핏줄을 중시하고, 가족끼리 옹기종기 모여 살고.. 나이 들어서도 서로 자주 왕래하고 도와가며, 의지해 가면서 살아간다. 또 부모는 다 큰 자식도 평생을 걱정하며, 자식들 역시.. 한국 사람들은 부모에 대한 효 사상을 미덕이라 여기며 살아가는데, 그것에 대한 바람직한 방향성이 이 드라마에 녹아있다.
주인공 성찬혁(최수종)은 가난한 집 아들이어서 사랑하는 여자와 쉽게 맺어지지 못하지만, 가난한 부모를 원망하지 않으며.. 찬혁의 아버지(김인문)는 아들 때문에 직장을 잃게 되고 힘들게 살아가지만, 자식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여느 부모들 못지않다. 찬혁(최수종)과 찬우(배용준)에게는 약간 모자란 듯한 누나(송채환)가 한 명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모자란 누이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며.. 대놓고 막 표현하진 않지만, 그 누구보다 서로를 위해주고 살뜰하게 챙겨주는 '우애가 깊은 남매'들이다.
어린 시절부터 강한 인연으로 묶여 있는 찬혁(최수종)과 효경(이승연)의 '극렬한 반대(효경이네 집안으로부터)에 부딪힌 사랑'은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끊어지지 못하고, 아슬아슬한 인연의 끈을 계속 이어가는데.. 결국 효경의 집안 사람(아버지와 삼촌)들은 무력으로 그 둘을 갈라놓고, 성실하고 착한 청년이었던 찬혁은 결국 반신불수의 몸으로 사경을 헤매게 된다. 그 이후부터의 이 드라마의 흡인력은 꽤나 폭발적이었다.
드라마 초반부터 쭉 깔아온 이 드라마의 기본 정서 자체가 '가난하지만, 연로한 홀아버지를 공경하면서 서로 애틋하게 위해주는 찬혁이네 집안의 가족애와 은근한 형제애'를 끊임없이 노출해 왔기 때문. 또한 찬혁이네 가족의 그러한 모습은 기본적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가장 한국적인 미덕이기에, 형 찬혁(최수종)의 사고에 이어지는 찬우(배용준)의 분노는 전 시청자들의 분노이기도 하며.. 무력으로 찬혁을 불구로 만들어 버린 효경이네 집안 사람에 대한 찬우의 응징(복수)에, 전 국민들은 진정한 의미의 대리 만족과 함께 통쾌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그 비루하고도 감동적인 풍경
지나간 그 드라마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난 주저없이 그 장면을 꼽겠다. 오랜 혼수 상태 끝에 깨어난 찬혁은 다리를 못 쓰게 되어 목발 신세가 되고, 날마다 강가에 나가 그림을 그리는데.. 어느 날, 혼자 집에 돌아오던 찬혁은 언덕을 구르게 되고(그냥 넘어진 건지, 이 대목은 기억이 가물가물..) 시간이 늦도록 아들이 돌아오지 않자 찬혁을 데리러 간 아버지(김인문)는 넘어진 아들을 발견하고서 다 큰 아들을 업고서 집에 돌아오는데,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고... 난 드라마 <첫사랑>에서 그 장면이 가장 감동적이었다. 너무나도 한국적인 아버지의 아우라를 마구마구 풍기는 김인문 효과가 극대화 되어...
첫사랑.. 태어나서 한 번도 사랑이란 감정을 경험해 보지 않을 사람을 제하고는 '첫사랑'은 그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생의 한 과정인데, 첫사랑이어서 그만큼 더 애틋하고 첫사랑이기 때문에 그만큼 이뤄지기 어렵고.. 그러하기에, 그 누구에게나 쉽게 떨쳐버릴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아련하게 자리잡게 되는 이미지의 총체가 아닌가 싶다. 드라마 <첫사랑>의 엔딩 타이틀곡은 아역 출신 탈렌트이자 가수인 황치훈이 불렀는데, 그의 감미롭고 아련한 분위기의 노래가 이 드라마의 분위기를 한층 잘 살려 주었던 것 같다..
아련하고도 흐릿한 첫사랑의 기억..
황치훈은 '추억 속의 그대'로 많이 알려져 있는 가수인데, 난 그가 부른 노래 중 드라마 <첫사랑>의 타이틀 곡이었던 '널 만날 때까지'.. 이 곡이 참 듣기 좋다. 언제 들어도... 황치훈씨는 지금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 중이라고 하던데, 빨리 완쾌되어 다시 좋은 노래 들려 주었음 좋겠다..
조소혜 작가의 드라마 <첫사랑>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열린 결말'의 드라마이기도 하다. 집안 사람들의 거짓말로, 찬혁이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효경은 결국 모든 사실을 알게 되고.. 찬우(배용준)는 형에 대한 복수로, 어쩔 수 없이 효경이네를 망가뜨릴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사랑하는 두 사람 찬혁(최수종)과 효경(이승연)은 이루어져야 한다는 시청자와, 오랜 시간동안 찬혁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지극 정성을 쏟아 온 동네 여동생 신자(이혜영)와 이루어지는 게 더 낫다는 시청자의 대립으로 인하여(그 때는 지금과 같은 인터넷 게시판이 없었기에, 시청자들이 방송국에 직접 전화해서 압력을 가하는 형태였던 듯하다. ;;) 그 때 당시 엄청난 시청률을 자랑하던 그 드라마의 러브 라인 결말은 많은 대중들의 궁금증을 자아냈고, 모 교양 프로그램에서 ARS(?) 전화 투표같은 것도 했던 걸로 기억한다.
'찬혁-효경' 라인의 결말 VS '찬혁-신자' 라인의 결말~ 결과는..? 열린 결말이었다. 시청자들의 의견이 하도 막상막하였고 나름의 논리들을 갖고 있었기에, 사실 나도 작가분께서 어떻게 결말 지으실까 꽤 궁금했었는데(그 이전작 <젊은이의 양지>에서는, 굳이 열린 결말이라기 보다는 세 남녀가 그냥 각자의 길로 가는 걸로 땡~이었음) 드라마 <첫사랑> 마지막회에서는 <찬혁이 찬우에게 '신자에게 줄 꽃을 사러 간다'는 말을 흘리며 은근히 신자랑 잘해볼 마음이 있음을 암시했고, 엔딩 장면은 찬혁이 늘 그림 그리던 그 강가에 효경이 찾아와 둘이 애틋한 마음으로 마주 서 있는 풍경>으로 끝을 맺었는데, 그 상황에 대한 해석은 보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열린 결말이었다..
전도연이 읊었던 김수영 시인의 '풀'-'젊은이의 양지'
한류 스타 배용준 : 우정사, 그리고.. 205번 강재호
명작 '플란다스의 개', 네로가 갈망한 '루벤스의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