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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 걸작-여명의 눈동자

타라 2008. 7. 18. 17:45
어린 시절부터 쭉 보고 자랐던 '한국의 TV 드라마'들 중에 관심 있게 보았거나 기억에 남는 드라마는 참 많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드라마를 단 한 편만 꼽으라면 난 주저없이 <여명의 눈동자>를 꼽겠다. 물론 이 드라마 외에도 '매 회 재미있게 보고 감동 받은 드라마'는 많지만, 그럼에도 <여명의 눈동자>를 빼면 어쩐지 섭섭할 것 같기에...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방송 기간 : 1991년 10월 7일 ~ 1992년 2월 6일
극본 : 송지나 작가 / 연출 : 김종학 PD
출연 : 박상원, 채시라, 최재성(가나다 순) 등..
방영 기간 중 평균 시청률 : 58.4%

이 드라마는 원작 소설이 따로 있는데, 무려 10권 분량에 달하는 그 원작 <여명의 눈동자>를 읽어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여명의 눈동자>는 원작 소설 버전 보다는 조금 다르게 각색된 송지나 작가의 드라마 버전이 훨씬 낫다고... <여명의 눈동자>는 '청출어람' 느낌으로, 각색이 무척 잘된 드라마에 속한다. 지금은 조금 주춤할지 몰라도 그 때 당시의 송지나 작가는 꽤 좋은 드라마를 많이 썼는데, 그녀의 그 모든 작품을 통틀어서도 이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가 가장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억된다.

응시의 드라마 :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간 그들~

이 작품은 결코 짧은 몇 마디의 말로 규정 지을 수 없는 드라마인데.. 그래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생각하면, 어쩐지 마음이 복잡해지는 느낌이다. 이 드라마는 한 마디로,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아픈 생채기를 남긴 일제 강점기와 처절한 현대사에 대한 '응시'의 드라마이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병 든 시대, 나약한 조국'에 태어나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힘없이 떠밀려 간 세 주인공들의 삶을 다룬... 그리고, 그들의 모습은 시간적으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대한 민국 사람들의 슬픈 과거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부인할 수도, 쉽게 떨쳐버릴 수도 없는...그러한~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인 '윤여옥(채시라)'은 다분히 상징적인 존재가 아닌가 싶다. 결국엔 그 '역사의 증인'으로 남게 된 장하림(박상원)에게 그녀는 '조국과 같은 존재'였듯, 이 드라마를 응시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그녀는 조국과 같은 존재이다. 그 누군가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너무도 쉽게 내던져 버리고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조선에서.. 남의 나라 사람에 의해 인권을 유린 당하고, 짓밟히고, 사익을 위해 존재하는 매국노와 잇권 다툼의 열매에만 관심 있는 열강들 사이에서 도구로써 이용 당하고, 갈기갈기 찢겨져 버린 우리의 아픈 조국 말이다.

스스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그 누군가에 의해 '살아지는' 삶을 산다는 것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이 드라마 이전에 많이 나왔던 '일제 강점기를 소재로 한 영화나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그렇게 비범하거나 사상이 뚜렷하거나 투지가 강하거나.. 뭐, 그런 인물들은 아니다. 그래서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고, 공감이 많이 갔다고나 할까..?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 나오는 최대치(최재성), 윤여옥(채시라), 장하림(박상원).. 그들은 그저 '나름 미덕이라 여기는 가치들을 소중히 여기며 소박하게 살고싶은 나약한 인간들'에 불과했다. 이 드라마 속에서 그들의 삶을 규정 짓는 것은 '본인의 강렬한 투지나 의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그 때 누구를 만났으며, 어떤 상황에 처해져 있었는가?'에 따라 달라졌다.


태어날 때부터 그들에겐 '우리 나라'라고 할 만한 조국이 없었다. 이 주인공들이 대단한 꿈을 꾼 것도 아니고 '그저 소중한 사람들과 소박하게 살고싶을 뿐~'이었음에도, 그런 소박한 자유조차 이들에겐 허용되지 않았다. 외인들의 정복 야욕에 전쟁터로 내몰려야 했던 여옥과 대치와 하림이 그런 자신들을 지켜줄 조국도, 다시 돌아갈 조국도 없었던 것.. 그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살아 남아야 한다는 처절한 생존 본능'이었는데.. 독립 운동 하는 아버지를 두었단 이유로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험한 일을 당한 여옥(채시라)은 삶의 의욕을 잃고 끊임없이 자살 시도를 한다. 하지만 '사는 것'만큼 '죽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어서 번번히 실패하게 되는데, 그 지옥같은 곳에서 만나 사랑하게 된 대치(최재성)는 그런 여옥에게 삶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존재 그 자체로 그녀에게 '살아갈 이유'가 되어준다. 삶의 의지를 잃었던 여옥에게 <살아서 다시 만나기로 한 대치와의 약속과 뱃 속에 잉태한 아이>는 그녀가 애써 부여한 삶의 의미이자 지켜내야 될 그 무엇 & 목표가 되어 그녀의 고통스런 하루 하루를 지탱하게 만든다.


미래의 삶을 규정짓는 것 : 그들은 그 때, 누구를 만나게 되었나?

장하림 또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일단 살아남고 봐야 한다~'는 생각을 지닌, 최대치 만큼이나 '삶에 대한 의지'가 강한 인물인데.. 초반의 그에게선 살짝 기회주의자적인 면모도 엿보인다. 아니.. 살아남기 위해선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단력이 빠른, 무척 영리한 인물이라고나 할까- 원래의 하림은 그다지 애국심이 강한 인물도, 딱히 독립 운동에 큰 뜻을 품은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다만 '좋은 여자 만나서 자신이 배운 의학 지식으로 아픈 사람들 치료해 주며 소박하게 살고픈 인물'이었다.


허나 전투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장하림(박상원)은 731 일본 방역 급수 부대장에게 발견되고, 그가 가진 의학 지식으로 인해 충격적인 생체 실험에 투입된다. 그 이전에 인연을 맺은 적이 있는 의사 장하림(박상원)을 사이판에서 다시 만나게 된 윤여옥(채시라)은 순전히 '자기 아버지 & 은인과도 같은 하림이 하는 일을 도울 수 있다'는 이유로 첩보원 생활과 독립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버마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대치(최재성)는 죽음의 문턱에서 마침 그를 구해준 인물이 '팔로군 첩자이자 공산주의자인 김기문(이정길)'이었기에, 그 역시 공산주의자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 드라마 내에서 이들의 삶을 규정짓게 되는 것은 본인이 지닌 강렬한 열망이나 뚜렷한 명분이 아닌, 삶과 죽음을 오가는 그 아슬아슬한 상황 속에서 <그 때, 그들이 누구를 만나게 되었는가?>에 따라 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들이 그 때 다른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상황에 처해지게 되었다면, 아마 '기존에 갔던 길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었을 것이다. 돌아갈 조국도 없었고 하루 하루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처해진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그리 많지 않았으며,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잔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자신도 모르게 휩쓸려 가게 되어버린 양상이 강하다.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원본은 길이 보전되어야 한다 : 다시 못 올 최적화된 굳 캐스팅

<여명의 눈동자>가 지닌 또 하나의 미덕은 '이 드라마엔 연기 못하는 배우가 없다'는 것이다. 주/조연 할 것 없이 다들 제 몫을 잘 해주었는데, 촬영을 담당한 스텦과 배우들 & 다수의 엑스트라들까지 너무나 고생해서 찍은 티가 나는 TV극이다. 다들 고생이었지만, 특히 세 주인공 중에서 유난히 처절한 '대치' 역을 맡은 최재성은 힘든 장면을 꽤 많이 찍은 듯하다. 버마 전선에서 살아남아, 생존을 위해 그가 '살아있는 뱀을 뜯어먹던 장면'은 아직까지도 많이 회자되고 있는 유명한 장면이다. 너무나 리얼한 명연기로~


최재성은 당시 이 장면을 찍기 위해 진짜 며칠을 굶었다고 한다. 연기자라고 해서 다 같은 연기자는 아니라고 생각하는지라, 이런 열연을 펼쳐주는 연기자에게야말로 진정으로 박수 쳐주고 싶다. 그 때 당시, 아직 20대 초반에 불과한 나이에 '파란만장한 윤여옥의 삶'을 너무도 잘 표현해 준 채시라 역시 대단했다. 사전 제작된 대작 드라마에 홍일점 여주인공이라 나름 경쟁이 치열했을텐데.. 지금 생각해도, 그 때 당시 활약했던 연기자들 중엔 채시라가 이 역할에 가장 적역이었다고 생각한다. 채시라는 고전적인 마스크나 기본적인 체형 면에서 '윤여옥' 캐릭터와의 씽크로율이 무척 좋은 여배우였다. 따뜻한 가슴을 지닌 로맨티스트로 많은 여성 시청자들을 설레게 했던 장하림 역의 박상원도 그렇고, 이 드라마 속 주연진들 구성은 전반적으로 '탁월한 굳 캐스팅'이 아니었나 싶다.

이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만큼은, 원작이 따로 존재하는 여느 드라마들처럼 나중에 '리메이크' 한다고 설레발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드라마는 리메이크 안하고, 91~92년 버전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를 그 자체로 길이길이 보존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중간중간 편집이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있고, 17년 전 드라마라 그런지 '엔딩 크레딧' 화면도 좀 촌스럽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7년 전에 벌써 이런 드라마가 만들어졌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후, 많은 세월이 흐르는 사이 '기술의 발달'로 전체 화면의 때깔은 최근 드라마들이 훨씬 나아졌을지 몰라도 '그 스케일이나 작품의 깊이, 극적인 구성, 전반적인 완성도' 면에선 <여명의 눈동자> 만한 드라마도 없다는 생각이다. 세 주인공 캐릭터도 좋았고, 마지막 엔딩 장면까지 예술이어서 많은 감동을 남긴 채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며, 당시 '시청률'이나 '대중적인 화제성' 면에서도 꽤 대단한 드라마였었다.


주인공 캐릭터 제대로 살려가며 각색한 작가도 대단하고, 여러 나라를 전전하며 찍어온 감독도 대단하고, 그 속에서 열연을 펼쳤던 배우들도 대단했던..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는 그렇게 기억된다. 아직까지도... 또한, 생각하면 '굉장히 가슴 먹먹해지고, 마음이 답답해지는 그런 드라마'이기도 하다.

제국주의 독일이 설치니까 같이 무대뽀로 설쳤던 일본이란 나라가 '멀쩡한 자기네 나라 놔두고 남의 나라를 꿀꺽하려고 했던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이건 국민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단체 대 단체'로써 미안해 하고, 사과 받아야 하고, 책임 느껴야 하는 그런 일인 것-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단체에 속한 개개인들까지 '일방적으로 한 쪽은 모두 피해자이고, 한 쪽은 모두 가해자'이고.. 그런 것은 아니다.

피해자 안의 가해자, 가해자 속의 피해자들..


개념 없는 일본 권력자의 '정복 야욕'에 고통 받고 신음했던 존재는 비단 나라를 빼앗긴 조선인들 뿐만이 아니다. 힘없는 조선 사람 외에 중국인, 러시아인 등도 비도덕적이고 파렴치한 일본군의 생체 실험에 마루타로 희생되었으며 '같은 일본인'들도 자기네 '권력자'들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거나, 원치 않는 전쟁에 동원되거나, 단체로 폭탄 맞고 죽어야 했던 것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 하림과 같이 731 부대에 근무하며 '잔인한 생체 실험 대상자들에 대한 기록화'를 남기던 동료 일본인은 원래는 아름다운 것 &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한 열망이 강한 인물이었으나, 인간 이하의 잔혹한 일들이 벌어지는 그곳에서 결국 그 짓을 그만 두기 위해 스스로 자기 손목을 자르게 된다. 대치와 같이 버마 전투에 투입되어 동고동락하던 일본군 병사는 '늘 일본에 있는 딸을 그리워하고 다시 돌아가서 우동집을 차리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열악한 환경의 타지에서 아사하고 만다. 여옥과 같이 위안부 생활을 하던 일본인 여자도 불행하긴 마찬가지-


결국 일본의 '소수 권력자'가 벌이던 정복 전쟁은 다른 나라 사람을 불행에 빠뜨림은 물론이거니와, 자기네 나라 사람들에게도 그다지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던.. 그런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일본인들도 참 많이 죽게 되었으니 말이다. 인간의 역사는 '파렴치한 소수의 욕심 & 소수 권력자들의 잔혹함에 의해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희생 당해야 하는 그런 무의미함'을 도대체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까..?

당시 이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충격적이고, 안타까웠으며, 남의 나라 꿀꺽 하러 온 니혼징(일본인)들보다 더 열 받고 짜증나게 만들었던 존재는 '같은 조선인이면서도 일본에 충성을 다 바쳐가며 내 나라 독립 시키려고 애쓰는 독립 투사들 잡아다가 고문하고 괴롭히던 스즈키(박근형) 같은 매국노 일본 순사'였다. 같은 민족 잡아넣는 데에 일본인들보다 더 열 올리며, 자기 출세와 사리사욕에 눈 멀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무개념 무대뽀 몰상식한 조선계 일본 경찰-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수치 :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정의와 상식

다시 돌아갈 조국을 만들기 위해, 혹은 아버지-어머니 모시고 가족끼리 함께 살고 싶어서 독립 운동 하는 장하림과 윤여옥을 잔인하게 고문하던 조선인 출신 일본 형사 스즈끼(최두일)는 1945년 해방을 맞게 된 뒤에도 경찰서에서 한 자리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여전히 활개치고 다니게 되는데... 해방 후에, 하림(박상원)이 경찰서에서 그런 스즈끼(박근형)를 우연히 발견하고서 경악을 금치 못하며 분노를 쏟아내던 장면은 그 때 당시 드라마를 보던 입장에서도 가장 충격적이고 분노스러웠던 장면으로 기억된다.


남의 나라 가지려고 쳐들어 와 온갖 만행을 저지르며 인권 유린을 일삼던 일본, 물론 나쁘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나쁜 것은 '개인적인 욕심과 호사를 위해 같은 민족의 피를 빨아 자기 배를 불리던,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친일파 매국노들'이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벌어 간다고, 독립 투사들이 목숨 바쳐가며 되찾기를 열망해 온 나라에서 저렇게 '그 달콤한 열매를 도둑놈처럼 꿀꺽하는 이들'은 따로 있었으니, 그게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비극적인 일이 아니었나 싶다. '민족의 배신자들 & 열강들의 이해 관계와 잇권 다툼의 합작품'이 가져 온 반 토막 난 조국,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는 사이가 되어버린 그 이후의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서 말이다..

그 누군가가 돈 몇 푼에 가차없이 팔아치운 나라.. 그 속에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짓밟히고, 고통 속에 신음하며 죽어 갔다. 열심히 독립 운동 하고, 내 나라 내 조국을 되찾아 오면 모든 게 다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그들을 향한 '해방 후의 조국'엔 더 큰 비극과 복병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 드라마 속에서도 주인공들의 삶은 해방 이후의 삶이 더 처절하다.

그 끈질긴 존재감을 자랑하던 '슬프고 아픈 역사'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이 드라마 속에서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사이판에서 조선인 위안부에 대한 흔적을 없애기 위해 일본군이 그녀들을 숲 속에서 집단 사살 했을 때 '만삭의 여옥이가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장면', 다시 만나게 된 일본인 동료가 그런 윤여옥에게 "정말 질기군. 그 속에서 또 살아 남았단 말이야~?" 하던 그 대사.. 어쩐지 재미있으면서도 기억에 남는다.


그랬다- 그들은 정말 질겼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겨 가며, 극한 고통 속에서도 그들은 끈질기게 살아 남았는데.. 그 대목에서 '인간의 질긴 생명에 대한 경외심'마저 느껴졌다. 본질적으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그저 질고의 역사 흐름 속에 휩쓸려 갔을 뿐인 한 아이의 엄마=조선의 여인 윤여옥'은 그 누가 팔아넘긴 조국 때문에 잔인하게 짓밝히고,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랬던 그녀는 결국 남(하림)과 북(대치)으로 분단된 조국을 다 끌어안으며,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리산 자락의 일부가 되었다.

그녀는.. 그 한 많은 여인은 하림이 느꼈던 것처럼 그 자체로 우리에게 '조국'과 같은 존재, 시간적으로 그리 멀지 않은 '한국의 슬픈 역사'였다. 지리산 자락에 여옥과 대치를 묻고 혼자 살아남은 하림이 '희망'적인 미래로 기대어 견뎌내기로 한 그 무정한 세월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