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최초의 대형 창작 뮤지컬이라는 <디에(나비) : 버터플라이즈>는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와 <돈 주앙>에 참여했던 스텝(감독, 연출가, 안무가..)들이 다시 함께 모여 만든 뮤지컬이어서 그런지, 극을 보다 보면 그 작품들에 대한 이미지가 문득 문득 떠오르곤 한다.
그 중 가장 지배적인 이미지는 <노트르담 드 파리>에 나왔던 떠돌이 거리 시인 '그랭구와르(브루노 펠티에)'에 대한 이미지이다.
중국 뮤지컬 <디에(蝶)>는 오래 된 중국의 고대 설화 <양산백과 축영대>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졌는데, 이 '양축(양산백과 축영대)' 스토리는 중국에서 꽤 여러 번 드라마와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이 뮤지컬 <디에>에 나오는 '양산백과 축영대' 스토리는 그 양축 설화와 주인공 이름만 같다 뿐, 스토리와 캐릭터의 특징은 완전 다르다.(전반적인 스토리에 대한 기본 맥락은 비슷함)
모 보도 자료에 따르면, 이 뮤지컬 스토리가 그렇게 확 달라지게 된 데에 질 마으(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연출자..)씨가 관여했다고 한다. 중국 최초의 대형 창작 뮤지컬 <디에>는 세계 시장을 겨냥해서 만든 뮤지컬인데, 이 뮤지컬의 모티브가 된 양축 설화의 '원래 스토리대로 만들면 세계 시장에서 어필할 수 없다'며 연출가 질 마으(Gilles Maheu)가 다른 내용으로 가자고 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래서 탄생하게 된 스토리가 원래의 <양산백과 축영대> 이야기와는 줄거리가 많이 다른 지금의 중국 창작 뮤지컬 <디에> 스토리인 것 같다.
'양산백과 축영대' 이야기는 서극 감독의 영화 <양축>을 통해 본 적이 있는데, 드라마로 만들어진 '양산백 & 축영대' 스토리와 세부적인 설정은 좀 다르겠지만 비교적 기본적인 설화 내용에 충실한 이야기 같았다. 그 내용들에 따르면 '양산백'은 몰락한 가문의 자제로, 다시 가문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서원에서 (요즘으로 치면) 근로 장학생으로 성실하게 공부하는 가난한 '학생'이고, 그 서원에 여자의 신분을 숨기고 유학 온 부잣집 딸 축영대와 의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다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인물이다.
나중엔 과거에 급제한 뒤 조그마한 벼슬을 얻게 되어(요즘으로 치면 말단 공무원 정도?) 축영대와의 약속대로 그녀에게 청혼하러 가지만 워낙에 대단한 집안인 축영대네 부모는 그녀를 더 대단한 집에 시집 보내려 하고, 청혼하러 온 가난한 집 총각 양산백을 무시하며 하인들을 시켜 장대비 속에 폭행한 뒤 쫓아낸다.
이에 큰 병을 얻게 된 양산백은 세상을 떠나고..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정략 결혼' 시키려는 세도가의 집에 가마 타고 시집가던 축영대는 양산백의 무덤 앞에 내려 슬퍼하는데, 이 때 거친 비바람이 몰아치고 무덤이 쩍 갈라진다. 축영대는 갈라진 무덤 안으로 몸을 던지고, 둘은 죽어서 사랑을 이루며 하나가 된다는 스토리.. 그 주위를 두 마리의 나비가 날아다닌다는 결말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연출했던 질 마으(Gilles Maheu)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참여한 중국 뮤지컬 <디에>에선 그랬던(서원의 학생→말단 관리직) 양산백을 떠돌이 '방랑 시인'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뮤지컬 기획하고 만드는 데 시간도 되게 많이 걸렸다던데(광고 때리기론 중국 뮤지컬 <디에> 기획에만 10년, 제작에 4년 걸렸다나..? 그런데, 이런 내용을 10년이나 기획할 거 있었나 싶었다. ;;) 그 사이, 스토리 텔링에 대한 갖가지 의견이 오고 갔을 것 같다. 원래 스토리 대로라면 세계화에 성공할 수 없다며 질 마으가 다르게 가자고 했다던데, 그래서 나온 남자 주인공 캐릭터가 거리 시인 '그랭구와르 버전의 양산백'~?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에 나오는 화자 & 음유 시인 '그랭구와르'는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에도 나오는 캐릭터이다. 1998년 프랑스에서 이 뮤지컬이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을 때 '그랭구와르' 역을 맡았던 배우가 이 뮤지컬 DVD에도 나오는 '브루노 펠티에(Bruno Pelletier)'인데, 이 브루노의 '그랭구와르'와 중국 뮤지컬 <디에(蝶)>의 남자 주인공인 방랑 시인 '양산백' 캐릭터가 아주 비슷하다.
<노트르담 드 파리>에 나오는 그랭구와르는(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에선 '시인'이 아닌 '극작가'였음) 여주인공 에스메랄다와 정식 부부는 아니지만, 형식적인 혼례를 치르게 된다. 미인의 발자취를 따라 집시들 소굴에 들어가게 된 그랭구와르가 거지 왕초에 의해 교수형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들의 관례에 따라 에스메랄다가 그를 남편 삼겠다고 함으로 그의 목숨을 구해주게 된 것-
이 뮤지컬 첫날밤 송(페뷔스란 이름) 장면에서 그랭구와르(브루노 펠티에)가 에스메랄다(엘렌 세가라)에게 껄떡대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시점에서 에스메랄다가 푹 빠져있는 남자는 페뷔스이고 결국 저 둘은 '친구 같은 부부'로 남게 된다..(원작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면 오갈 데 없는 그랭구와르가 에스메랄다와 형식상 부부가 되어 집시들 소굴에서 같이 지내지만, 거처는 따로 따로다.)
이 작품에서 에스메랄다와 '사랑(욕망의 사랑, 순수한 사랑, 파멸의 사랑)'으로 얽히게 되는 인물은 페뷔스, 콰지모도, 프롤로이지만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DVD를 처음 봤을 때 저 장면에서 엘렌 세가라의 에스메랄다와 브루노 펠티에의 그랭구와르가 유독 잘 어울려 보여서 마음 속으로 은근히 '에스메랄다-그랭구와르' 라인을 지지한 적이 있었다.(한국어 버전 <노트르담 드 파리>에선 문혜원의 에스메랄다와 박은태의 그랭구와르가 비주얼적으로 참 잘 어울려 보여서 또, 은근히 그 라인을 지지함. 장난 삼아...)
하지만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그랭구와르와 에스메랄다, 그 두 캐릭터가 그렇게 엮일 일은 없을 것이다. 엄연히 원작이 있는 작품이고, 이 작품 속 멜로 드라마에서 주요 인물은 '콰지모도-에스메랄다-프롤로'이니까.. 그래서 많이 아쉬웠는데, 원래 스토리에선 학문에 전념하는 학생이자 말단 관료였던 '양산백' 캐릭터를 '방랑 시인'으로 탈바꿈시켜 여주인공 축영대와 러브러브하게 만든 중국 창작 뮤지컬 <디에>를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연출가였던 질 마으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참여하여 스토리 설정에까지 관여한 중국 뮤지컬 <디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때 당시 브루노 펠티에가 분한 방랑 시인에게 꽂힌 질 마으의 '브루노표 그랭구와르 캐릭터에 대한 오마주'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닐까 하는...
뮤지컬 <디에>가 중국에서 공연되었을 때의 '양산백' 모습을 보면 <노트르담 드 파리>에 나오는 '그랭구와르'와 의상도 상당히 비슷하다.(1막에서 푸른색 계열의 코트) 그런데, 올해(2009년) 내한 공연 때에는 양산백 의상이 은색 반짝이 쟈켓으로 바뀌었다.
이번 <디에> 내한 공연 때 남자 주인공(양산백)이 촌스런 반짝이 의상을 입고 나왔다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던데, 원래 중국에서 공연했을 때엔 그 반짝이 의상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리고 이 뮤지컬이 작년(2008년)에 한국 DIMF 폐막작으로 왔을 때의 사진을 보니, 그 때도 남자 주인공 양산백 의상은 반짝이 쟈켓이 아닌 베이지색 코트를 입고 있던데.. 어찌하여 이번 내한 공연에선 주인공 양산백이 70년대 트롯 가수같은 촌티 폴폴 반짝이 의상을 입게 만들었을까..?
<디에> 중국 공연 때 양산백이 입었던 원래 의상은 나름 괜찮아 보였는데, 이번에 남자 주인공 의상을 '감흥 팍 떨어뜨리는 반짝이 옷'으로 바꿔버린 제작진(의상팀)의 그 아스트랄한 안목이 대략 황당할 따름이다.(이 뮤지컬로 내한한 남자 주인공 둘 다 노래는 잘하던데, 저런 촌티 나는 반짝이옷을 입고 무대에 서야 했다니.. 배우들이 불쌍하다.)
하지만 이 뮤지컬에서 '방랑 시인'으로 설정된 남자 주인공 양산백 캐릭터 자체는 꽤 마음에 들었다. 호방하고, 자유롭고, 유들유들 남자답고, 장난스럽고, 자신의 시적인 감성으로 어필하며 여주인공 축영대에게 껄떡대는 모습이 딱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의 주접맨 '브루노 펠티에의 그랭구와르' 캐릭터를 떠올리게 하던데...
원작에 그렇게 되어 있지 않아서 결코 이룰 수 없었던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의 시인 그랭구와르와 여주인공 에스메랄다 라인에 삘이 꽂힌 일부 팬들의 마음처럼, 연출자 질 마으씨 역시 그 때 그 뮤지컬을 하면서 은근히 '그랭구와르(브루노 펠티에)-에스메랄다(엘렌 세가라)' 라인에 아쉬움을 갖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또한 그 뮤지컬에서 너무나 매력적으로 나왔던 화자(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 '브루노 버전의 그랭구와르'는 연출자 질 마으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이자, 그가 그 작품을 통해 유난히 감정 이입을 많이 했던 인물이었을지도...
그래서 중국 뮤지컬 <디에>를 만들면서 원래의 '양산백과 축영대' 스토리에선 서원의 학생으로 나오는 남자 주인공 '양산백' 캐릭터를 <노트르담 드 파리>의 '그랭구와르'처럼 '거리의 시인'으로 만들어 여주인공이랑 사랑하게 만드는.. 이름만 '양산백'으로 바꾼 거리 시인 '그랭구와르의 멜로의 완성'~? 지난 번, 중국 창작 뮤지컬 <디에>의 스토리에 관련하여 '양산백과 축영대' 설화 원래의 내용대로 가는 걸 질 마으씨가 반대하여 다른 설정으로 전향했다는 기사를 읽고난 뒤 문득 저런 류의 음모론(?)이 떠올랐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그렇게 바뀐 스토리가 결코 싫지 않다. 축영대 캐릭터는 영화 <양축>에 나왔던 천방지축 남장 여인 캐릭터가 더 매력 있지만(그것두 극 중반까지만.. 그 영화 후반부의 축영대 캐릭터는 이상하게, 별로로 느껴졌다. 공부하라고 학교 보내 놓았더니, 하란 공부는 안하고.. 만일 '몰락한 자기 가문을 일으킬 성실한 학생이었던 양산백'의 사랑을 축영대가 그리 적극적으로 갈구하지 않았다면 양산백이 그렇게 젊은 나이에 허망하게 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양산백은 '그랭구와르' 확장판인 뮤지컬 <디에>에서의 그것이 조금 더 매력 있게 다가왔다. 영화 <양축>에 나오는 '양산백'은 배려심 많고 학식이 깊은 잘생기고 점잖은 선비, 뮤지컬 <디에>에 나오는 '양산백'은 크게 잘생기진 않았지만 자유분방하고 유들유들하고 호탕한 사내다움이 넘쳐서 매력적인 방랑 시인으로..
'양산백과 축영대' 원래의 이야기나 영화에서는 결말에 무덤이 쩍 갈라져서 여주인공이 거기에 뛰어드는 설정이지만, 이 뮤지컬에선 양산백에 대한 화형식이 거행되고 여주인공이 그 불길에 함께 뛰어든다는 설정인데, 이 대목도 좀 마음에 드는 부분이다. 그 장면은 대형 LED 화면의 보조를 받아서 연출되었는데, 뮤지컬 <디에> 그 장면에서 불꽃 속에 두 남녀가 합쳐지고 뒤이어 나비가 날아오르는 장면은 꽤 극적이고 멋지다 생각되는 장면이었기에...
개인적으로 잘 납득이 가지 않는 결정적인 옥의 티라면.. 이 '양산백과 축영대' 스토리에서 그 두 남녀가 목숨까지 걸 정도로 그렇게 절절한 사랑에 빠지게 된 것에 대한 어떤 '개연성'이 영화에서도, 뮤지컬에서도 좀 아리쏭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다.(그렇게 절절한 사이가 되기까지의 그 '과정'이 말이다..)
(서로 사랑에 빠졌다 치고) 결국 주변의 방해로 인해 안타깝게 헤어지게 된 뒤의 내용이 무척 슬프게 느껴지기는 했다. 하지만 뮤지컬 <디에>에선 양산백이 축영대에게 도둑 뽀뽀를 한 뒤 나중에 멋진 시를 읊어주자 축영대가 급 사랑에 빠지면서 나중에 그 사랑에 목숨을 걸고.. 영화 <양축>에서는 또 여주인공이 남학생으로 위장하여 양산백과 친구처럼, 의형제처럼 둘이 티격태격하는 씬이 그렇게 많이 나오지는 않았음에도 헤어질 때 되니까 나중에 목숨까지 걸 정도로 급 절절한 연인 사이가 되어 있더라는 그 설정이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중간에 뭔가 빠진 듯한 느낌 때문에..)
그건 2시간 짜리 이야기물(영화, 뮤지컬)의 한계였을까..? 만일 이 '양산백과 축영대' 스토리를 2시간 짜리물이 아닌, 세밀한 묘사가 가능한 '소설'이나 기본 40~50부작은 된다는 중국 '드라마'로 봤다면 전후 관계에 대해 좀 더 '개연성 있는 스토리'를 볼 수 있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