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적으로 '종교'는 특정인의 마음에 위안과 평화를 가져다 주기도 하기에 그 자체로선 좋은 기능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지난 역사 속에서 이 '종교'란 이름으로 터무니 없는 죽음을 당한 이들이 참 많다. 대대적인 '종교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었고 말이다.
어떤 것을 지나치게 숭배하다 보면 그것에 속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배타성'이 생겨나기도 하는데, 그 배타성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 왔던 게 아닐까 한다.(어떤 이유로든, 인간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고 인류를 사랑하라는 진리를 가르쳐야 할 종교'의 이유로 무분별한 살생이 벌어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대의 철학자이자 '최초의 수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여성 수학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긴 고대의 히파티아(Hypatia) 역시, 그 종교적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한 인물 중 한 명에 속한다.
히파티아(355~415 or 370~415)는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한 '학문 기관' 관장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뒤 철학, 예술, 문학, 자연 과학 등 다방면에 걸친 양질의 교육을 받았으며, 학문적 자질이 뛰어났던 부친에 의해 그리스 아테네나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머리 좋고 똑똑한데다 미모까지 좋았던 유학파 히파티아(Hypatia)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고대의 엄친딸'이 아니었나 싶다.
미모가 출중했던 그녀로 인해 가슴앓이 하며 구애해 오는 남성들도 있었지만, 히파티아는 그들을 향해 자신은 '진리와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지낸 걸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 플라톤주의 학파의 지도자'로서 수려한 외모와 기품 있는 태도 & 유창한 화법과 학문적 재능을 펼쳐 보였던 히파티아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으며, '학문의 여신'으로 칭송 받던 그녀의 강의를 듣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명사들 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등 다양한 곳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히파티야는 과학의 영역에서 학문적으로 연구한 많은 것들을 기호화 하는 데 힘썼다. 그 당시는 로마에서 국교화 하려던 '크리스트교'와 그리스 로마의 '전통 종교'가 대립하던 시기였다. 심지어, 교회에서는 학문의 영역에 속했던 '그리스 수학'을 이교 신앙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수학 관련 학문에선 특정한 기호들이 쓰이는데, 당시의 그리스도교에선 이것을 종교와 결부시켜 박해했다. 실제로, 그들에 의해 원주율(π)이 '이교도'의 기호로 간주되어 그것을 사용한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412년 경에 키릴(Cyrill)이 당시 '세계 최고의 학문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로 오게 되었고, 그 후 히파티아는 '키릴'의 지시에 의해 그리스도 교도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리스도교와 전통교가 대립하던 가운데 어느새 '그리스도교의 시대'가 도래했고, 여러 면에서 그것과의 접점을 찾지 못했던 '그리스 철학'과 당시의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누렸던 '여성 전통 철학자 & 정신적 지도자 히파티아'는 그들에게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키릴(Cyrill) 주교를 추종하던 광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 몇이 길 가던 히파티아(Hypatia)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며 교회로 납치해 간 뒤 그녀의 알몸을 날카로운 조개(굴) 껍질로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불태워 죽였으며, 그 중 일부는 짐승들에게 먹이로 주었다고 한다.(요즘에도 그렇지만, 그 옛날에도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들이 참 많았던 듯하다..)
'철학'의 영역 뿐 아니라 천문학, 수학, 물리학 등 '과학'의 영역에서도 빼어난 성과를 남긴 그녀의 죽음은 많은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결국.. 그녀의 죽음 이후 많은 유능한 학자들이 이 도시를 떠나게 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는 '학문 중심지'로서의 명성을 잃게 되었다. 그곳에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장서들도 사라졌고, 그 후 알렉산드리아는 매우 오랫동안 이름 없는 평범한 도시로 전락했다. 뛰어난 인재를 죽인 대가를 톡톡히 받게 된 것이다.
히파티아(Hypatia)의 죽음 이후, 그녀가 연구하던 수학적 분야의 발전도 주춤했던 걸로 알고 있다. 엄청난 자질과 재능을 지닌 여성 지도자 히파티아의 잔혹한 죽음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할 종교'가 배타성을 띄게 되면 어디까지 막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 한다..
어떤 것을 지나치게 숭배하다 보면 그것에 속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배타성'이 생겨나기도 하는데, 그 배타성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질러 왔던 게 아닐까 한다.(어떤 이유로든, 인간의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 주고 인류를 사랑하라는 진리를 가르쳐야 할 종교'의 이유로 무분별한 살생이 벌어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대의 철학자이자 '최초의 수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여성 수학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많이 남긴 고대의 히파티아(Hypatia) 역시, 그 종교적 이유 때문에 죽임을 당한 인물 중 한 명에 속한다.
히파티아(355~415 or 370~415)는 고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한 '학문 기관' 관장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뒤 철학, 예술, 문학, 자연 과학 등 다방면에 걸친 양질의 교육을 받았으며, 학문적 자질이 뛰어났던 부친에 의해 그리스 아테네나 이탈리아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머리 좋고 똑똑한데다 미모까지 좋았던 유학파 히파티아(Hypatia)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고대의 엄친딸'이 아니었나 싶다.
미모가 출중했던 그녀로 인해 가슴앓이 하며 구애해 오는 남성들도 있었지만, 히파티아는 그들을 향해 자신은 '진리와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지낸 걸로 알려져 있다.
당시 '신 플라톤주의 학파의 지도자'로서 수려한 외모와 기품 있는 태도 & 유창한 화법과 학문적 재능을 펼쳐 보였던 히파티아를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으며, '학문의 여신'으로 칭송 받던 그녀의 강의를 듣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명사들 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등 다양한 곳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라파엘로의 그림 '아테네 학당'에 나오는 히파티아(부분)
히파티야는 과학의 영역에서 학문적으로 연구한 많은 것들을 기호화 하는 데 힘썼다. 그 당시는 로마에서 국교화 하려던 '크리스트교'와 그리스 로마의 '전통 종교'가 대립하던 시기였다. 심지어, 교회에서는 학문의 영역에 속했던 '그리스 수학'을 이교 신앙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수학 관련 학문에선 특정한 기호들이 쓰이는데, 당시의 그리스도교에선 이것을 종교와 결부시켜 박해했다. 실제로, 그들에 의해 원주율(π)이 '이교도'의 기호로 간주되어 그것을 사용한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다.
412년 경에 키릴(Cyrill)이 당시 '세계 최고의 학문 도시'였던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로 오게 되었고, 그 후 히파티아는 '키릴'의 지시에 의해 그리스도 교도들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그리스도교와 전통교가 대립하던 가운데 어느새 '그리스도교의 시대'가 도래했고, 여러 면에서 그것과의 접점을 찾지 못했던 '그리스 철학'과 당시의 대중들로부터 큰 인기를 누렸던 '여성 전통 철학자 & 정신적 지도자 히파티아'는 그들에게 눈엣가시였던 것이다.
키릴(Cyrill) 주교를 추종하던 광적인 그리스도교 신자들 몇이 길 가던 히파티아(Hypatia)를 마차에서 끌어내려 무자비한 폭행을 가하며 교회로 납치해 간 뒤 그녀의 알몸을 날카로운 조개(굴) 껍질로 갈기갈기 찢어버린 뒤 불태워 죽였으며, 그 중 일부는 짐승들에게 먹이로 주었다고 한다.(요즘에도 그렇지만, 그 옛날에도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들이 참 많았던 듯하다..)
당시 상황에 대한 기록 : 제일 아름답고, 가장 품위 있으며, 학식이 깊은데다, 다방면에 걸쳐 완벽한 히파티아와 그녀의 역사는 키릴 주교의 오만과 경쟁심 & 잔인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알렉산드리아 신부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졌다..
'철학'의 영역 뿐 아니라 천문학, 수학, 물리학 등 '과학'의 영역에서도 빼어난 성과를 남긴 그녀의 죽음은 많은 학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결국.. 그녀의 죽음 이후 많은 유능한 학자들이 이 도시를 떠나게 되었으며, 알렉산드리아는 '학문 중심지'로서의 명성을 잃게 되었다. 그곳에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장서들도 사라졌고, 그 후 알렉산드리아는 매우 오랫동안 이름 없는 평범한 도시로 전락했다. 뛰어난 인재를 죽인 대가를 톡톡히 받게 된 것이다.
히파티아(Hypatia)의 죽음 이후, 그녀가 연구하던 수학적 분야의 발전도 주춤했던 걸로 알고 있다. 엄청난 자질과 재능을 지닌 여성 지도자 히파티아의 잔혹한 죽음은 '자비와 사랑을 실천해야 할 종교'가 배타성을 띄게 되면 어디까지 막 나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 또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