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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미완의 성공-'제빵왕 김탁구' 작가의 '유리 구두'

타라 2010. 6. 23. 18:07
경쟁작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그 혜택으로 수목극의 최강자로 등극한 <제빵왕 김탁구>.. 똑같이 맞바람 피웠는데 남편(전광렬) 쪽 바람은 '아름다운 사랑'으로 미화되고 부인(전인화)은 전형적인 '악녀'로 그려지는데다, 그 집 가장이 부적절한 '혼외 정사'로 낳은 아이(사생아 김탁구)가 능력이 출중하여 성공하고 본처 딸들은 찬밥 취급 받는 그런 설정들이 꽤 불편하게 느껴지지만, 어쨌든 각종 자극적인 설정으로 많은 이들의 흥미를 유발하고 있는 드라마임에는 틀림없다.

현재 강은경 작가가 집필하고 있는 KBS 수목극 <제빵왕 김탁구>는 같은 작가가 쓴 2002년 드라마 <유리 구두>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많다. 강은경 작가는 비교적 다양한 컨셉의 드라마를 썼는데 '전형적인 악인 캐릭터가 등장하고, 캔디형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결국 행복을 되찾게 되는 <제빵왕 김탁구>의 통속극적인 스토리'는 <유리 구두>랑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개인적으로, 강은경 드라마들 중에 지영수 PD가 연출한 <오 필승 봉순영>이 제일 좋았다..)


2002년에 방영되어 30~40%대를 오가는 시청률을 기록했던 SBS 주말극 <유리 구두>는 한 '자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태희(김지호) & 윤희(김현주) 자매의 아버지(하재영)는 원래 재벌가의 아들이었으나, 부모와의 연을 끊고 가난한 여자를 택해서 강원도 한 산골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직 나이가 어린 이들 자매의 아빠는 사고로 죽고 태희는 윤희를 데리고 서울의 할아버지(제하 그룹 회장)를 찾아가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동생을 잃어버린다.

어린 윤희는 그 와중에 부상을 입고서 '기억 상실증'에 걸리고, 제하 그룹에 앙심을 품고 접근하려던 어린 재혁은 태희를 제하 그룹 김필중 회장(백일섭)에게 데려다 주고 그 공으로 학업과 출세를 보장 받는다.(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재혁의 의도는 어린 시절에 자기 가족을 몰락시킨 제하 그룹 회장에게 복수하려는 의도 같음) 언니와 헤어진 어린 윤희는 기억을 잃은 뒤 황국도(이희도)와 오산댁(송옥숙) 부부의 집에 구박댕이로 더부살이 하면서 '선우'란 이름으로 살아간다. 드라마 <유리 구두> 이야기는 한마디로, '재벌가 손녀딸'이 자기 정체를 모른 채 '개고생'하는 스토리인 것이다.


이 드라마에도 전형적인 악녀 캐릭터가 나온다. 주인공 선우(김현주)가 더부살이 하던 황국도네 딸 '승희(김민선=김규리)'라는 인물로, 그녀는 선우가 잃어버린 반지
(그녀가 태희 동생 윤희라는 증거)를 꿀꺽한 뒤 동생을 찾던 태희(김지호)에게 접근하여 그 재벌가의 손녀딸로 들어간다. 이런 류의 이야기는 외국의 하이틴 소설 & 만화 <유리의 성>을 원형으로 한 설정으로, 우리 나라 드라마에도 여러 번 나온 적 있는 내용이다.(정애리-원미경 주연의 <사랑과 진실>, 김하늘-하지원 주연의 <비밀> 같은 드라마)

드라마 <유리 구두>의 '승희' 캐릭터는 그 결말부를 다 보고 나서 꽤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악녀이다. 기존의 한국 드라마에선 <미스터 큐>의 악녀 황주리(송윤아)부터 시작하여 '실컷 악녀짓 하다가 막판에 죄를 뉘우치고 주인공을 도와주거나 개과천선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유리 구두>의 악녀 승희(김민선)는 끝까지 자기가 해치려 했던 선우(김현주)에게 자기 잘못했다 소리 안하고 큰 소리 치던.. 마지막까지 악녀 본성을 버리지 않은 '일관성(?) 있는 악녀'였기 때문이다.

지금 보면 그냥 그럴텐데, 당시엔 워낙에 '악인이었다가 막판에 급 천사로 돌아선 작위적인 드라마 속 악녀'들이 많았었기에 <유리 구두>의 '끝까지 악녀 승희 캐릭터'가 좀 새롭게 다가왔던 부분이 있었다. 여주인공 선우=윤희(김현주)의 자리를 대신 꿰어차고 재벌가 손녀딸 행세하던 승희(김민선=김규리)는 이 드라마에서 굉장히 세련되고 예쁘게 나왔었고, 조연 전문이었던 김민선(김규리)이 드라마 <유리 구두>에서의 강렬한 악녀 캐릭터를 기점으로 주연급으로 올라선 걸로 알고 있다. 이 드라마 이후의 극들에선 김민선
(=김규리)이 대체로 '주인공'으로 출연했던...(잘 맡은 악역, 열 선역 안 부러운 것이다~)



여느 한국 드라마들이 그러하듯 <유리 구두>에도 남녀 간의 '로맨스'가 빠지지 않는데, 극 전반적으로 진짜 연애를 한 이들은 여주인공 선우(김현주)와 재혁(한재석)이었다. 물론 선우의 옆에는 그녀를 향한 해바라기 사랑을 하다가 결국 사랑을 이루려는 찰나 죽게 되는 철웅(소지섭)이 있고, 태희(김지호) 역시 재혁만을 바라보지만, 이 드라마 후반부 내용 이전까지 '서로 사랑' 모드는 선우-재혁 커플이었다.

개인적으로 드라마 <유리 구두> 속에 나왔던 '선우(김현주) & 재혁(한재석)'의 닿을 듯 말듯 한 은근한 로맨스를 꽤 좋아했었는데, 여기엔 분위기 있는 배경 음악도 한 몫한 것 같다. 이 드라마의 선우와 재혁이 만나는 씬엔 Cecilia의 'The Prayer'란 곡이 자주 흘렀고, 그 때 당시 이 곡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곡은 특히, 봄밤에 들으면 딱 좋은 음악이다.

Cecilia - The Prayer(드라마 '유리 구두' 삽입곡)

제하 그룹의 후계자인 태희(김지호)는 어린 시절에 자기를 보호해 준 남자(당시엔 소년)이자 마음 속으로 사랑하는 재혁(한재석)에게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그는 사실 '자기 할아버지를 죽게 만든 제하 그룹 회장(백일섭)'에게 복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태희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그 사실을 숨기고 살아가는 미스테리한 인물 재혁(한재석)은 가난한 고아 선우(김현주)와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되고, 힘든 환경에서도 늘 씩씩한 그녀가 성장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면서 서로 사랑에 빠진다. 이 '선우'가 사실은 제하 그룹의 손녀딸이자 태희 동생인 '윤희'라는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이들의 관계는 '하이틴 로맨스물에서의 전형적인 실장님 & 힘들어도 꿋꿋하고 착한 여주인공' 모드였는데, 한재석이 맡은 이 '재혁'이란 캐릭터가 단순히 배경 좋은 실장님이 아니라 '몰락한 집안의 자제'로 어떤 면에서 보면 선우(김현주)와 비슷한 부분도 있고 '자기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스스로를 옭죄는 인물이었기에 그 관계가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자신을 사랑하는 태희(김지호)가 옆에서 아무리 잘해줘도, 이 남자에게 태희는 그저 '원수의 손녀딸'이자 자기가 원수를 갚기 위해 접근한 '이용의 대상'일 뿐이었고 그런 데서 진정한 사랑의 안식을 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자신의 '기만적인 삶'에서 징글징글함을 느끼며 늘 외로워하던 재력 있는 능력남 재혁이 제하 그룹의 청소부로 들어온 밝고 꿋꿋한 선우에게서 자신이 잃었던 순수함, 편안함 같은 걸 느낀게 아닐까 한다. 시크하면서도 자상한 남자 재혁(한재석)이 의지할 데 없는 선우(김현주)를 보호자처럼 챙겨주고, 그녀의 열정과 재능을 알아보고 '제하 그룹 청소부→사무 보조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서로 조심스레 마음을 열어가는 그런 설정들이 좋았다. 잔잔하면서도 설레는 커플이었는데, 드라마 결말부를 통해 결국 이들이 맺어지지는 못했다. <유리 구두>의 멜로는 주인공 남녀 넷 다 뿔뿔이 흩어지는 결말~


드라마 <유리 구두>에는 여주인공 선우(김현주)를 사랑하는 또 다른 남자 철웅이 나온다. '선우 덕후'이자 '날건달 깡패'인 철웅(소지섭)은 약간 주접스러우면서 귀여운 남자 캐릭터이다. 선우가 더부살이하던 승희(김민선)네 이웃집 남자로, 원래는 승희가 좋아하던 오빠였다. 하지만 이 철웅(소지섭)이 선우(김현주)만을 좋아하자, 승희(김민선=김규리)가 그런 그녀를 미워하면서 더 삐뚤어지게 된 경향이 있다.


내내 선우(김현주) 곁을 맴돌며 선우와 사랑에 빠진 재혁(한재석)을 질투하고, 줄기차게 그녀를 짝사랑했던 철웅(소지섭)은 결말부에 가서 결국 사랑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사랑을 이루려는 찰나, 죽음을 맞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다. 그러면서, 극이 약간 삼천포로 샌다. 원래 드라마 <유리 구두>는 '어릴 적에 언니와 헤어져서 힘들게 살아가던 여주인공 선우(김현주)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동 통신 업계에서 성공하는 스토리'를 담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후반부에 가서 갑자기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더니, '80년대 홍콩 영화스러운 내용'으로 마무리 짓게 된 것이다.

애초에 기획되었던 주인공의 '성공 스토리'는 쏙 들어가고, <유리 구두> 후반부에 가면 갑자기 이 선우가 '불치병(or 난치병)'에 걸린다. 그 와중에 승희(김민선)가 아닌 '선우(김현주)가 진짜 제하 그룹 손녀딸이자 태희(김지호)의 동생 윤희'란 사실이 밝혀지고, 다 죽어가던 선우는 친언니의 골수 이식으로 살아나긴 하지만, 그 이전에 한바탕 '신파극'을 찍으며 청승을 떨기도 한다. 이 극의 여주인공인 선우(김현주)는 재혁(한재석)과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재혁을 사랑하고 있는 태희(김지호)가 친언니로 밝혀진 뒤엔 자매끼리 한 남자를 두고 다툴 수가 없어서 결국 재혁을 포기하게 된다.

그리곤 자신이 백혈병 걸려서 고생할 때 지극 정성으로 간호해 준 철웅(소지섭)을 선택하고 그와 결혼하려 하지만, 갈 데까지 몰린 승희(김민선)가 그들의 결혼식 날 폭력배를 사주하여 선우(김현주)를 납치하라 시키는 바람에 일이 꼬인다. 선우의 납치 소식을 듣고 찾아간 철웅(소지섭)은 결국 폭력배와 싸우다가 죽음을 맞게 되고, 그들의 결혼식은 피로 물든다.(그 뒤로 '연적인 선우 납치극'을 벌였다가, 결과적으로 '사랑하는 철웅의 죽음'이란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 이 드라마 속 악녀 승희는 감옥행~)


자신이 재벌가 손녀딸인 사실을 모른 채 개고생하던 여주인공이 자기 노력과 열정으로 '이동 통신 업계에서 성공하는 스토리'를 담을 예정이었던 <유리 구두>는 이렇게, 막판에 가서 '여주인공의 불치병과 조폭을 동원한 납치극 소재, 결혼 당일날 신랑이 피 흘리며 죽고 신부가 오열하는 신파극'을 펼쳐 보이며 살짝꿍 산으로 가 버린다. 비록 처음의 기획 의도를 벗어나서 주인공 선우(김현주)의 커리어적인 부분이 흐지부지된 것은 아쉽지만, 그래두 두 쌍의 남녀가 뿔뿔이 흩어지는 <유리 구두>의 '결말 내용'이 나름 말은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인의 기본 정서라는 게 있는데, 아무리 그 사랑이 아름다웠어도 친언니가 오매불망하는 남자와 그 여동생을 결합시키는 건 어쩐지 모양새가 좋지 않다. 그래서 서로 사랑했던 선우(김현주)와 재혁(한재석)은 결국 헤어지게 된 게 아닐런지... 또한, 철웅(소지섭)이 오랜 해바라기 사랑 끝에 선우의 마음을 얻게 되긴 했지만 '깡패 출신의 남자'가 '알고 보니 재벌가 손녀딸이었던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다 식으로 마무리 짓는 '남자 신데렐라 이야기'로 가는 것도 왠지 이상하기에 막판에 이 철웅이란 인물을 죽여버린 게 아닐까 한다.

드라마 <유리 구두>에서 자기 욕망을 위해 주인공을 괴롭혔던 악녀 '승희(김민선)'는 결국 죄값을 치르게 되고, 선우와 결혼하려 했던 '철웅(소지섭)'은 결혼식 당일날 죽고, 자신을 사랑했던 두 자매 사이에 끼어있던 '재혁(한재석)'은 외국으로 떠나고, 잃어버린 핏줄을 되찾은 '태희(김지호)'와 '선우=윤희(김현주)' 자매는 두 사람이 협력해서 다시 회사를 잘 이끌어갈 것 같은 뉘앙스를 주며 끝났다.

마침 동일한 작가의 최신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가 '거성 회장의 핏줄이지만 내쳐졌다가, 밑바닥에서부터 온갖 역경을 이겨내며 제빵업계 경영자로 성장하는 주인공 김탁구의 성공 스토리'를 다룬다고 하니, 유난히 이 드라마 <유리 구두> 생각이 많이 났다. 각종 자극적인 설정이 들어간 '전형적인 통속극'이란 점에서 두 드라마가 참 비슷한데, 막판에 '철 지난 홍콩 영화 이야기'로 새느라 '주인공의 성공 신화'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던 <유리 구두> 때의 '미완의 성공 스토리'를 결국 <제빵왕 김탁구>를 통해 각 잡고 다시 재현하려는 건 아닌가...싶었기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