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 드라마 <추노>를 보다 보면, 뜻하지 않은 장면에서 빵 터질 때가 있다. 이 드라마에는 대놓고 코믹을 담당하는 감초 조연 캐릭터들도 존재하지만, 그런 드러난 개그 요소가 아닌 '표면적으론 진지한 캐릭터'들에서 가끔 개그의 향기를 느낄 때가 있다. 특히 기본 말투 자체가 무심한 듯 조분조분 이야기하는 정적인 느낌의 '태하(오지호) & 언년=혜원(이다해)' 커플에서 야릇한 코믹 삘을 받곤 하는데, 대놓고 오버하면서 웃기는 것보다는 이런 것들이야말로 고퀄러티 유머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우리 반에 여대생 여러 명이 교생 실습을 왔었는데, 그 중 한 명은 꽤나 무뚝뚝하고 무미건조한 분위기의 선생님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애들이 좀 무서워 했었으나, 좀 지나고 보니 그 경직된 분위기의 선생님이 '무표정하게 한 마디씩 던지는 말'이 은근히 재미있어서 반 애들이 많이 웃곤 했었다. 그래서 1달 지난 뒤엔 그 '무뚝뚝 교생'이 가장 웃기는 인기 선생님으로 등극한 적이 있다. 드라마 <추노>에서 별로 리듬 타지 않고 조곤조곤 말하는 송태하(오지호)와 언년이(이다해), 쫓기는 두 남녀의 쏘 시크한 대화를 통해 가끔은 그 '안 웃길 것 같으면서 심하게 웃겼던 교생 선생님'이 떠오르곤 한다.
그것에 대해, 언젠가부터 '관심녀'로 자리잡은 언년이(이다해)에게 만큼은 이미지 구기기 싫은 폼생폼사남 태하(오지호)가 '군인도 그럴 수 있다'며 변명하는 내용이 방영되었다.
태하 : "이 길이 아닌가 봅니다~"
언년 : "군인이 길을 못 찾아요?"
태하 : "(제가 허술한 게 아니라) 군인도 지도가 없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죠~(어쩌구 저쩌구.. 블라블라~)"
언년 : '(피식~) 그런 식으로, 장황하게 변명 안해도 되는데....'
태하 : '(진지~) 지금 나.. 길 못찾는다고 무시하는 것임..? ;;;'
언년 : '이 아저씨, 자꾸 보니 귀엽네. 변명하는 것도 깜찍함~'
도망길에서, 멋진 장관을 앞에 두고 "아름다워요..!" 하며 감탄하는 여인에게 표정 변화 하나 없이(미안한 기색도 없이) 무심한 어투로 "이 길이 아닌가 봅니다~"라는 대사를 치는 상대남.. 이에 놀라며 "예~?"라고 물어보는 상대녀에게 그 남자는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돌아가죠~"라며 무척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과거 일에 대한 아픈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태하(오지호)와 언년(이다해).. 둘 다 비교적 말수가 적은 조용한 캐릭터인데, 이들이 한번씩 무심한 듯 내뱉는 그 대사들이 굉장히 웃기게 들릴 때가 있다.
태하와 언년이 하룻밤 묵기 위해 외딴곳의 어느 노인네 집 헛간을 신세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줄곧 같이 다니면서도 미처 그녀의 이름을 물어보지 못한 태하(오지호)는 언년=혜원(이다해)에게 이름을 물어보고.. 이에 혜원(이다해)은 지난 번에 태하가 스님에게 가르쳐 준 이름을 자신도 기억하고 있다는 식으로 관심을 표명한 뒤, 자신의 이름은 '혜원'이고 '어디어디 김가'라고 알려준다.
그러자.. 송태하(오지호)는 최근에 '관심녀'로 등극한 어여쁜 김혜원(이다해)에게 환심을 사고 싶었던 것인지, 자기 아는 친척 누구도 혜원과 같은 김씨이고.. 또, 누구누구도 그러하고..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 중에도 몇 명 있다고 신이 나서 이야기한다.(본인이 관심 있어하는 그 여자와 자신의 '공통점'을 끄집어 내어 대화를 부드럽게 만들고 서로 친해져 보려는 상대남의 자연스런 행동 패턴~)
또, 외가쪽에도 있고~ 제가 부리던 수하 몇도 그랬고..
(이만하면 혜원씨와 저, 공통점 열라 많은 거죠. 므훗~)"
하지만, 안 그래도 '오리지널 양반'이 아니어서 찔리는 구석이 있는 짝퉁 양반 혜원(이다해)은 태하(오지호)의 그 '관심 화법'에 쏘 시크한 태도로 일관하여 그 남자를 무척 뻘쭘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뒤의 상황 역시 (대놓고는 아니지만) 이 커플의 '은근히 코믹한 상황'에 화룡점정을 찍어주는 내용이었는데...
그렇게 뻘쭘했던 두 남녀는.. 남자 쪽에서 또 여자에게 '보호 본능' 느끼며 두어 번 구해줌으로써 그 관계가 조금 진전되었다. 김홍도, 신윤복 못지않은 그림 솜씨를 지닌 송화백(송태하)이 언년이(이다해)의 치맛자락에다가 그림 그려주고.. 6회까지만 해도 나름 '개그 사극'이었던 <추노>가 7회에 가선 태하와 언년의 '에로(?) 사극'으로 변모하더니, 최근 언년이와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아저씨도 못 풀어본 그녀의 옷고름을 태하가 '부상을 치료한다'는 명분으로 풀게 되고... 남녀가 유별한데 이 극의 태하(오지호)와 언년이(이다해)는 서로 치료해 주고, 손 잡아 주고, 툭 하면 몸이 부딪히고 하더니만은 언년이는 자기네 집 호위 무사(데니안)에게 송태하와 혼인했다는 뻥을 치고, 이젠 같이 제주도 섬으로 떠나는 모양이다.
<추노> 7회를 통해 오랫동안 서로를 그리워 했던 대길(장혁)과 언년(이다해)의 사이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 같다. 부상을 입고 몸이 완치되지 않아 비틀거리던 언년이가 의식을 잃은 채 태하(오지호)의 등에 업혀, 손에 들고 있던 '대길 도련님과의 오랜 사랑의 증표=조약돌'을 어느 대나무 숲에 떨어뜨리고야 말았으니... 무척 오랫동안 '일편단심 대길이었던 언년이의 마음'이 이제는 태하에게로도 향하게 된다는 의미인 것일까~? 개인적으로 '무뚝뚝한 송태하(오지호)와 짝퉁 양반 언년이(이다해)'의 쏘 시크하면서도 한 번씩 야릇하게 웃겨주는 '무덤덤 개그 화법'에 은근한 매력을 느끼고 있는지라, 이들의 '의외의 장면에서 빵 터지는 고품격 개그'가 앞으로도 종종 등장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