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쨌거나 더불어 살아가길 원하며 선한 쪽을 추구한다
사람 자체가 완벽한 존재도 아니고 모든 사람들이 도덕군자 같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타인을 괴롭히는 악' 보다는 '더불어 공존하려는 선한 쪽'을 바람직하다 여기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측은지심을 갖게 마련이며, 비교적 공정한 잣대로 사물을 바라보려 애쓰며 살아간다.
정말 아스트랄한 정신 세계를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시청자(대중)들은 그런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지녔기에 극 중에서 계속 당하기만 하는 선한 주인공이 나중에는 결국 승리하기를 바라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통쾌함의 미덕을 느낀다. 실제로, 기존의 무수한 TV 드라마 속에서 그런 내용이 나온 대목이나 그 비슷한 유형의 드라마들은 흥행 면에서도 크게 성공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오래 전, 계속 당하기만 하던 선한 주인공이 승리하고 끝났음에도 마지막회 방영 후 대중의 무수한 질타를 받았던 독특한 드라마가 한 편 있었다. 2000년도에 방송된 MBC 미니 시리즈 <진실>이란 드라마인데, 지금 <찬란한 유산>을 쓰고 있는 소현경 작가와 현재 쉬고 있는 김인영 작가가 공동 집필한 걸로 나온다. 원래 그런 류의 드라마만 쓰던 작가들은 아니지만, 이 드라마는 각종 자극적인 설정을 첨가하는 등 처음부터 흥행을 노리고 만든 상업적 성격의 드라마였다.(주인공을 괴롭히기 위해 각종 음모를 일삼는 극강의 악녀가 나오고, 부정한 대리 시험에, 누명에, 때 되면 알아서 복구되는 기억 상실과 악인들의 극단적인 자살 설정까지 골고루 등장하여 극의 '질적인 면'에서 비난도 많이 받은 드라마였음..)
편집의 난이 안겨다 준 '통쾌함' 보다는 '찜찜함'의 결말
<KBS 슈퍼 탤런트 선발 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공채 탤런트로 출발한 박선영은 그 후 이런 저런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크게 뜨질 못하다가 <진실>에서의 악녀 캐릭터로 주목 받았다. 박선영이 이 드라마를 통해 인상적인 모습으로 주목 받은 건 맞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극 중에서 너무나 악독하고 비상식적인 행위를 일삼는 악녀였다.
이 드라마 속의 주인공 자영(최지우)은 가난한 집에 태어난 죄로 악녀 신희(박선영)를 위해 대리 시험을 봐 줬음에도 갖은 수모를 다 당하고, 사랑하는 이를 잃을 뻔 하고, 억울한 누명까지 쓰는 등.. 극 내내 진짜 불쌍한 건 자영이 쪽이었고, 이 드라마의 마지막회는 그렇게 당하기만 하던 자영(최지우)이 드디어 누명을 벗고 해피 엔딩을 맞이하며, 악독한 신희(박선영)네는 망하는 전형적인 권선징악 스토리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드라마 마지막회는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안겨주는 게 아닌, 왠지 모를 '찝찝함'을 안겨주며 주인공 커플(최지우, 류시원)이 맹비난을 받는 기이한 결과물을 가져왔다. 나중에 자세한 사정을 알고 보니, 그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이 드라마 최종회에서의 '편집의 난' 때문인 듯했다.
선량한 대중들의 긍휼심 : 천하의 악당도 몰락할 때 쯤 되면 은근히 불쌍하다?
사람의 심리란 참 묘해서.. 어느 정도 분량이 있는 드라마의 경우, 선한 주인공이 내내 악당에게 당하는 내용이 펼쳐질 때에는 악인을 막 욕하면서 '와, 저거 너무 나쁘네~' 생각하며 주인공을 불쌍하게 여기지만, 막상 극 후반부에 상황이 역전되어 악인이 궁지에 몰리고 극강의 처참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 그간 그 사람이 저질러 왔던 악행은 깡그리 잊고 눈앞에 펼쳐진 상황만을 보구서 '저 사람도 가만 보면 좀 불쌍하다~'란 긍휼심을 갖게 된다는 것-
드라마 <진실>에 나온 악녀 신희(박선영)의 경우에도, 그녀가 가만 있는데 주인공인 자영(최지우)이 신희를 괴롭힌 것이 아니라 자영이 쪽에선 억울한 누명을 벗어야 했고 그동안 약탈 당한 걸 되찾아 와야 하는 입장에 있었으며.. 신희(박선영)와 그녀를 사랑했던 남자(손지창), 또 신희의 아버지(정욱)는 그간 자신들이 저질러 온 악행이 있었기에 '자업자득' 성격으로 몰락한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결말부에 그들 '악인들(박선영, 손지창, 정욱)의 몰락'을 보는 입장에서 굉장히 불쌍하게 느껴지게끔.. 감정 이입 잘 되게끔 공 들여서 그려내었고, 졸지에 그동안 당하기만 하던 메인 주인공 커플(최지우, 류시원)이야말로 생각 없는 악당들이고 그들 불쌍하게 몰락하는 악인들이 진짜 주인공인 것처럼 비춰지게 되었다.
극단적인 악당에게도 마음이 가는 경우 : 주인공보다 더 못 가진 '결핍'의 미학~
이 드라마의 악녀인 박선영이 '묻지 마 악역'이 아닌, 나름 이유 있는 '결핍의 악역'이었던 것도 여기에 한 몫 했다. 금전적으론 가진 게 많지만, 드라마 <진실>의 악녀인 신희(박선영)는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얻지 못했다. 신희가 죽도록 사랑하던 현우(류시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신희의 라이벌인 자영(최지우)이만을 사랑했으며, 이 드라마 속의 악녀는 본인이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마음을 얻지 못했던 '불쌍한 악녀'였던 것이다.
거기다, 이 악녀(박선영)는 '능력' 면에서도 선한 주인공에게 딸려 거기에 큰 열등감을 갖고 있다. 자신도 아버지에게 인정 받고 싶었지만 머리 나쁘고 공부 못해서 번번히 아버지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눈치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어린 시절부터 라이벌인 자영(최지우)은 늘 자기보다 공부도 잘 하고 똑똑한 아이여서 은근히 신희(박선영)의 부러움을 사곤 했었다.
웬만한 멜로 드라마 뺨 치는, 비극적이고 애절한 '악당들의 분위기 있는 최후'
결정적으로.. 드라마 <진실>의 마지막회에 가서는 '비록 극단적인 악녀이지만 신희(박선영)도 알고 보면 불쌍한 애였어요~'를 부각시킨 데 이어, 자신과 비슷한 욕망을 지녀 같이 나쁜 짓 했지만 그래두 꾸준히 자신만을 사랑해 준 남자 승재(손지창)의 마음을 신희(박선영)가 받아들여 둘이 같이 애틋하게 입 맞추고 동반 자살하는 걸로 나왔다. 그 장면은 또 어찌나 애틋하고, 분위기 있게, 영화같이 그려졌는지-
보는 입장에서는 마치 그 둘이 진짜 주인공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만든 연출이었다. 그들은 갖은 나쁜 짓은 다 저지른 탐욕스런 악인들이고, 자신들이 부정한 행위를 저지른 게 까발려진 뒤 감옥 가는 게 두려우니까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녀(박선영) 가족이 망하고 그녀가 죽음에 이르는 대목을 눈으로 직접 보니까 은근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 뒤에 이어진 드라마 <진실>의 마지막 장면은 '기억이 돌아와 다시 자영(최지우)과 결합하게 된 현우(류시원)가 억울한 누명을 벗은 그녀와 같이 유학을 가는 해피 엔딩의 결말'이었는데, 선한 주인공이 결국 악녀의 핍박에서 벗어나 행복을 찾아가는 해피한 결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시청자들로부터 욕을 먹은 장면이었다.
시청자에게 긍휼심이 있듯, 선량한 주인공에게도 긍휼심이란 게 존재해야 욕 먹지 않을까?
아무리 그동안 나쁜 짓을 저질렀어도 한 때 신희(박선영)는 현우(류시원)랑 잘 아는 동생에다 현우를 사랑한 여자였으며, 자영(최지우)과도 어린 시절부터 잘 알고 지낸 사이였으니 그 집이 망하고 신희가 자살했으면 좀 불쌍하게 여길 만도 한데, 이 주인공 커플이 전혀 그런 마음 없이 그 바로 다음 장면에서 즐겁게 히히덕 거리며 비행기 타고 유학 가는 장면이 마지막 장면으로 방송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상황에서 더 불쌍한 쪽에 마음 가게 되어 있는 대중들은 그것이 권선징악적 결말에 자업자득적 성격의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악녀의 몰락 바로 다음에 이어진 주인공 커플(류시원, 최지우)의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너무 인정머리 없다고 맹비난을 퍼부었으며, 드라마 종영 후 시청자 게시판은 이 드라마 마지막 장면에 대한 '비난의 글'들로 가득 찼던 적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도, 악녀가 비극적으로 최후를 맞이한 뒤 바로 이어진 '즐거워 보이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그렇게 산뜻하게 느껴지지는 않아서 이 드라마 결말부가 많이 실망스러웠었는데.. 나중에 대본 서비스를 통해 마지막회 대본을 읽어보니, 정작 '대본'에는 그렇게 나와 있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주인공 커플이 울면서 슬퍼하는 내용이 대본에는 별도의 씬으로 나와 있었던 걸로..
그런데 이 드라마 최종회 본방에 나온 내용은 대본에서 읽은 것과는 약간 다른 느낌의 연출로, 자영(최지우)과 현우(류시원)가 신희(박선영)의 죽음에 울면서 슬퍼하는 얼굴 표정이 '클로즈 업' 되어 나온 장면 없이 미소 지으며 즐거워 하는 그들 모습이 부각되어 마지막 장면을 장식해 버리니, 어쩐지 인정머리 없는 애들 같다는 느낌을 주면서 그 주인공 커플이 많은 대중들로부터 급 비호감을 사게 된 것이다.
극의 '주제'에 대한 주객 전도 : 극단적인 악의 미화인가, 상식이 통하는 미덕의 제시인가~
드라마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완성된 영상물을 통해 전해지는 특유의 '정서(감성적인 측면)' 역시 참 중요한데, 드라마 <진실>에서는 마지막회 방영분을 통해 '악녀의 비극성'을 부각시켜 많은 대중들이 불쌍한 악인에게 '감정 이입'하게끔 만들었고, 선한 주인공 커플은 졸지에 경박한 분위기의 주변 인물로 전락시켜 버리는 우를 범했다.
굳이 이 드라마의 마지막회가 방영되기 이전에도, 신분 상승의 욕망을 품었지만 그를 벌레만도 못하게 여기는 신희 아빠로부터 처절하게 버림 받은 승재(손지창)와 자신의 악행이 밝혀질까 불안해 하는 신희(박선영).. 스토리 전개 상, 그 커플이 꽤 인상적인 캐릭터로 그려졌었다. 그래서 주인공 커플(최지우, 류시원)의 다시 찾은 행복과 유학길 보다는 악당들(박선영, 손지창)의 비극적인 죽음에 시청자들이 그만큼 더 감정 이입했던 것 같다.
애초에 작가가 드라마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자체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줄기차게 타인을 괴롭히는 악인이 돼라~'는 아닐진대, 2000년도에 방영되어 결말부에 주인공 커플이 무지하게 욕 먹은 <진실>이란 드라마도 그렇고, 요즘에 나오는 드라마들 중에서도 선한 주인공 쪽 캐릭터를 충분히 매력적으로 살리지 못한 채 뜬금없이 악인 캐릭터에게 너무 많은 매력을 부여하는 그런 드라마들이 종종 보인다.
이건 명백히 주객이 전도된 상황이며, 해당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이 전하려는 '주제'나 '메시지'를 흐려지게 만드는 요소라 생각한다.
진짜 완성도 높은 드라마는 선한 캐릭터와 악한 캐릭터 골고루 살리면서도, 작가가 애초에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끝까지 흐리지 않고 대중들에게 선명하게 전달할 수 있는 그런 드라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