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포 가는 길 (1)에 이어.. ] 황석영 단편 '삼포 가는 길'은 원작 '소설'과 '영화', TV '드라마' 버전 다 존재하며, 각각의 특징이 조금씩 다르다.
개인적으로 '구체적인 내용'이 좀 더 마음에 들었던 건 보다 담백하게 표현된 TV 문학관 <삼포 가는 길>이었는데, 영화 버전은 그 안에 나오는 '자연 풍광'이 정말 멋지다.(TV 버전에서의 배경은 살짝 '농촌 드라마' 삘이고, 영화 버전 <삼포 가는 길>의 겨울 풍경은 그보다 스케일이 크며 특유의 '영상미'가 있음. 시골 마을 '쥐불놀이'도 인상적-)
백화-영달 커플은 전반적으로 영화 쪽이 더 센 캐릭터이다. 영화의 노영달(백일섭)은 사나이 존심 강하고, 약간 꼰대 같은 기질 있으면서 우직하고 속이 깊은 남자 같다.
화려하게 생긴 이 버전의 백화(문숙)는 입담이 정말 좋으면서, 통통 튀고,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는 여자. 둘 다 허풍끼가 살짝 있으며(영달-약장수 시절 경험 미화/백화-실은 남자 경험 많이 없으면서 그 바닥 경험 부풀려서 얘기함), 싸울 땐 무서운 기세로 서로에게 달려든다.
하지만 정씨(김진규), 영달(백일섭), 백화(문숙)에겐 동류 의식이 있고, 이들은 모두 '은근히 서로를 위해주고 챙겨주는 따스한 인간미'를 선보이는 인물들이다.
투박한 듯 거친 듯 티격태격하지만, 극 전반에 걸쳐 이들이 보여주는 따뜻한 인간미는 극이 끝나고 나서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애잔한 정서와 더불어...
백화 : 이젠 술하고 밤이라면 지긋지긋해요.. 속치마꼴을 보면, 내 신세하고 똑같애요. 하두 빨아서 색이 바래고, 재봉실이 나들나들하게 닳아서 끊어졌어요. 참 한심하죠~
장르적 특성으로 TV 문학관 버전 <삼포 가는 길>은 등장 인물들이 사용하는 언어도 비교적 순화되어 나오고 '백화-영달'의 관계도 퓨어하게 표현되는데(원작 소설과 비슷), 영화 버전 <삼포 가는 길>은 '영화'라 그런지 약간의 노출이 있다. 그리고 '19금인 듯, 19금 아닌, 19금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너무 기대하지는 말 것. 이 장면에서 '모닥불'이 열일 함)
영화 <삼포 가는 길>은 원작 소설이나 TV 버전에 비해 후반부 영달(백일섭)과 백화(문숙)의 멜로적 요소가 강화된 경향이 있다.(이별 시의 애절함도 더 부각된 것 같고, 시간도 더 많이 할애하고...) 그에 따라, 정씨 아저씨(김진규)의 '중매쟁이'로서의 면모도 부각되었다.
이 영화 결말부를 보면서, 맨 처음엔 살짝 '잘못된 중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이 극에서의 백화는 먼 길을 동행하면서 '애초에 별로라 생각했던 영달이, 생각보다 꽤 괜찮은 남자'라 여기게 된다. 그래서 서로 정들지 말자고.. 정들면 피 보는 건 여자 쪽이라고, 좋아질까 두렵다는 말을 농담처럼 하게 되는데.. 다른 버전에선 정씨가 '둘이 잘해보면 어떨까?' 하는 의견을 아주 짧게 내비치고 말지만, 영화 <삼포 가는 길>에선 정씨 아저씨가 '백화랑 잘해 보라'며 영달을 계속 부추기는 뉘앙스다. 둘만의 자리까지 마련해 주며...
그래서 극 중반부 넘어서면서 나름 19금씬도 나오고, 직업이 술집 작부(창부)였어도 마음만은 20대 청춘의 순정을 간직한 '백화'가 '영달'에게 마음도 주고 몸도 주고 했는데, 결국 장터에서 영달이 백화를 놔두고 떠나 버렸으니 어쩐지 '먹튀한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더랬다. ;;
하지만 이 극의 영달(백일섭)에겐 백화(문숙)를 떠날 수밖에 없는 그만의 사정이 있다. 그는 지난 결혼(or 동거)에 실패한 경험과 그에 따른 아픔을 지닌 인물이다. 멀쩡한 집 딸과 사랑에 빠져 도시로 도망쳐 나와 살았는데, 열심히 살았으나 가난으로 인해 여자가 생활고로 쥐약을 먹은 아픈 과거. 착암기 기술자인 현재도 (겨울이어서) 일이 끊긴 채 떠돌아 다니는 신세라, 여자와 살림을 차린다는 건 본인 처지에 맞지 않다고 영달은 생각하고 있다.
(영화 버전) 영달 : (착암기로 바위벽을 뚫을 때면) 백팔번뇌가 쑥 빠져부러. 전신의 살덩이가 콩 튀듯 아우성을 쳐. 뼈다귀가 마디마디 지랄발광을 해. 피가 거꾸로 돌아부러~
백화는 봄까지 자신이 영달을 먹여 살릴 수 있다 했지만, 이 극에 나오는 영달은 약간 보수적인 면이 있는데다 사나이로서의 자존심이 강한 남자이기에 '마음'으로 끌려도 '현실'을 생각해서 결국 백화를 보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둘은 장터에서 헤어진 뒤로 기차역에서 다시 만나게 되고.. 정씨 아저씨(김진규)는 영달(백일섭)에게 '여자 마음'을 너무 모른다고 또다시 훈수 두지만, 일자리가 온전치 않은 영달은 그럼에도 자기 처지에선 백화를 보내야 한다 생각하고 '아쉬움' 한가득인 채 눈물의 이별을 한다. 백화(문숙)에게 '기차표와 빵, 삶은 계란'을 사주고, 얼마 안되는 남은 돈도 다 주고서... 백화는 여기에 또 엄청 감동하는데, 40여 년 전 영화이고 그 때의 정서이기에 이런 설정도 꽤 가슴 뭉클한 느낌을 전해주는 것 같다.
영달은 기차역에서 백화와 헤어지고, 정씨랑 삼포까지 같이 간 뒤 거기서 정씨와도 헤어지게 된다. 그런데, 이 버전의 정씨(김진규)는 끝까지 '사랑의 메신저'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은 채 일을 찾아 떠나는 노영달(백일섭)을 향해 '일 잡거든 백화 아가씨를 찾아보라'는, '백화를 만나게 되면 삼포에 같이 놀러 오라'는 말을 전한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 중에서도 은근히 그 둘의 헤어짐을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을 듯한데, 만일 요즘 영화처럼 별도의 디렉터스컷 DVD가 나온다면 그 안엔 '영화관 상영 버전'과 다르게 '백화와 영달이 재회하는 씬'이 추가되어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원작에서처럼 '백화와 영달이 기차역에서 헤어지는 결말' 쪽이 더 완성도 있고 좋다고 생각한다. 결말에 헤어지기에, 영달의 아쉬워 하는 마음 & 함께 하고 싶지만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그의 처지가 더 애틋하게 와닿고, 가난한 영달이 백화에게 사준 '차표 한 장'과 '빵/계란 봉투'가 그만큼 잔잔한 감동으로 와닿기에 말이다.
그래두 나름 여지는 주는 거니까...(이 영화에서의 백화는 결국 기차를 타지 않았다. 영달과 헤어진 그 역 근처에서 일하며, 그와의 재회를 꿈꾸는 것일지도...) 아직 나이가 젊으니, 살다가 언젠가 그 둘이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삼포 가는 길> 마지막에 정씨(김진규)가 향하던 고향 삼포(가공의 지명/떠도는 자에게 궁극의 안식을 주는 이상적인 마음의 고향)는 이제 더이상 예전 모습이 아니고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린 듯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여 안타까움을 자아내는데, 그의 안타까움은 결국 우리 모두의 안타까움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원작 소설) 정씨 : 감옥 뿐 아니라, 세상이란 게 따지면 고해 아닌가..
(영화 버전) 정씨 : 돈이란 너무 없는 것과 좀 있는 것과는 천지 차이지만, 좀 있는 것과 많이 있는 것과는 별 차이가 없어요~ 돈이란, 너무 많으면 화근이 되는 경우가 많아.
붓다와 같이 깨닫고 이슈아처럼 완전히 집으로 돌아간 자들 제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우리 모두는 '존재의 근원' 자리에서 떨어져 나온 채 매번 다양하게 역할을 바꿔가며 이 감옥 같은 행성에서 '고해의 삶'을 살고 있는 것 아닌가-
비단 이 작품 속 인물들 뿐 아니라, 왜 태어났는지 영문도 모른 채 '망각의 강'을 건너 와 지구 살이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고향) 삼포 가는 길' 위에 서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삼포 가는 길> 원작 소설엔 나오지 않지만, TV 드라마 버전엔 주인공 삼인방이 중간에 '(생일) 잔칫집'에 들러 허기를 채우는 장면이 나오고, 이만희 감독의 영화 버전엔 '상가(喪家)'에 들러 허기 채우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상가집에서 발원문이 흘러 나오던 영화 장면 중 이 대목이 특이하게 기억에 남는다. '반야심경'의 한 구절에 속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