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 폴리스

궁중 예법에 억눌린 조선 '왕'의 사생활

타라 2013. 2. 20. 17:21
우리 나라든, 남의 나라든 옛날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친인척끼리도 비인간적 행태를 일삼으며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벌인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왕'이라 해서 과연 그 삶이 영화롭고 좋기만 했을까..?

서양의 경우도 그렇지만, 우리 나라 '조선 시대 때 임금'이 지켜야 할 궁중 예법이나 그들이 처리해야 할 업무량 & 사생활 등을 살펴보면 그 삶이 썩 좋아 보이지만은 않는다. 당시 한 나라의 최고 자리였던 '왕'은 왕대로, 날마다 수많은 눈과 귀를 의식하며 '의무감에 투철한 피곤한 삶'을 살아야 했던 것이다.


지금보다 '의학적 수준'이 많이 낮았던 17세기에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루이 14세(Louis XIV)가 돌팔이 궁정 의사 때문에 치아를 다 뽑아서 평생 고생했다는 얘기는 꽤 유명한데, 우리 조선 시대 '임금'과 왕의 '주치의'는 엄격한 예법에 의해 세트로 고생을 하기도 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남들이 결코 터치할 수 없는 영역 & 사생활'이라는 게 있지만, 조선의 왕들은 여인과의 밤일부터 시작해서 밥 먹고 배설하는 일까지 사사건건 신하들의 보호와 간섭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조선 시대 왕의 좌변기 '매우틀'

그 시절 왕은 '큰 일' 볼 때에 혼자 뒷간에 가지 않고, 복이 나인이 가져온 용변기(매우틀 : 궁중 용어로 임금의 대변을 '매', 소변을 '우'라고 부름)에다 용변을 봐야 했으며, 볼 일이 끝나면 환관이나 나인이 명주 수건으로 임금의 그곳을 닦아 주었다. 유아기 시절의 어린 애도 아니고, 이 무슨 굴욕인지..;; 또한, 왕의 용변은 때로 내의원 소속 의원들이 '임금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맛보아야 했다.

왕의 건강에 이상이 있나 없나 알아보기 위해 x을 직접 맛봐야 했다니, 조선 시대 궁정 의사들의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듯... 날마다 '왕의 용변'을 받아내는 나인도 그렇고, 그걸 맛보는 의원도 그렇고, 그것은 너무나 비인간적인 삶이 아닌가- 아울러, 그런 원초적인 배설물 처리를 늘 타인에게 노출 당하고 감시 당해야 했던 의 고충도 결코 적지 않다 볼 수 있다.


조선의 왕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용변 처리'도 궁정 나인이 보는 앞에서 해야 했고, 중전이나 후궁들과의 '잠자리'도 대전 상궁의 진두지휘(?) 아래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것두 임금이 '원하는 때'에 '마음 내키는 상대'와 하는 게 아니라, 건강한 아들 즉 '보위를 이어받을 수 있는 왕자 생산'을 위해 그날의 운세를 봐서 적당한 상대와 날짜가 정해졌고 '경력 많고 나이 든 숙직 상궁' 여러 명이 옆방에서 관찰하는 가운데 밤일을 치를 수 있었다.(예민한 사람 같으면, 제대로 감흥도 안 왔을 듯..) 왕과 '동침하는 궁녀'들 경우에도, 상궁들이 직접 목욕을 시켜주고 밤에 사방에서 감시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 같다.


당시의 '임금'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지극히 보호 받아야 하는 존재였기에, 여인과의 잠자리에서조차 만일의 불상사를 대비하여 연륜 있는 '숙직 상궁'으로부터 이런저런 '조언'을 받아가며 거사를 치렀다고 한다. 이들은 '왕의 건강'을 위해 '지나친 밤일'을 제지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조선 시대 왕은 진짜 '사생활'이라곤 전혀 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철저하게 '공인(公人)'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요즘 연예인들이 주제 넘게 '공인, 공인' 그러는데.. 이런 게 진짜 공인이다.)

만일 '개인적 욕망에 무한정 충실하고 싶고 남한테 간섭받기 싫어하는 성향의 사람'이 그 시기 왕이 되었다면, 당장 '안 해, 안 해~ 이딴 거 줘도 안 해!!' 하며 딱 거부하고 싶어졌을 것이다. 실제로 그 때의 유력한 '왕위 계승자'들 중엔, 일부러 동생에게 '왕좌'를 양보하고 '음풍농월이나 하는 비교적 프리하고 편안한 삶'을 추구한 왕의 아들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의무감에 투철한 왕으로 살아가는 것보다 이 쪽(최고 권좌의 자리를 거부한 채 풍류를 즐기며 살아가는 왕의 형제) 삶이 훨씬 이상적으로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