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진 루돌프 황태자는 엄마인 엘리자벳 황후를 찾아가 자신의 일에 대해 '황제 아버지께 잘 좀 빌어달라고 간절히 부탁한 일'을 거절당하자, 어머니에게마저 버림 받았다 생각하며 죽기로 결심한다. 그런 그의 앞에 다시 '죽음의 무리들(죽음 캐릭터와 그 수행원들)'이 나타난다. 루돌프는 죽음(Tod)과 마지막 춤을 춘 뒤 '죽음의 입맞춤'을 하고선, 그가 건네는 권총으로 자살한다.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의 외아들인 루돌프 황태자'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아들의 죽음을 알게 된 엘리자베트(Elisabeth)는 뒤늦게서야 일전에 했던 자기 행동(아들인 루돌프의 부탁을 거절한 일)에 대해 땅을 치며 후회한다.
이 뮤지컬 DVD(2005' 빈 공연 실황)에서 '엘리자베트' 역을 맡은 마야 하크포트(Maya Hakvoort)는 '자기 삶에 대한 회한에 빠져드는 노래'를 부르는 정신 병원 장면과 '장성한 아들인 루돌프 황태자를 잃은 이 대목'에선 해당 캐릭터와의 굉장히 좋은 씽크로율을 보여준다. 당시 불혹의 나이였던 마야 하크포트(Maya Hakvoort)가 엘리자베트의 젊은 시절을 그리는 이 무지컬 앞부분에선 좀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중년 이후의 삶을 그리는 2막에서의 모습은 꽤 잘 어울리는 분위기~
이 극에서 엘리자베트는 루돌프가 죽고 나서 '어린 루돌프가 1막에서 엄마 찾을 때 부르던 노래 '엄마 어디 있어요?(Mama, wo bist du)'와 똑같은 멜로디의 노래 '루돌프 어디 있니?(Rudolf, wo bist du)'를 부르는데, 이 장면에서 만큼은 (비록, 실존 인물의 행적 그 자체로 전반적으로 비호감 캐릭터이긴 하지만) 유난히 엘리자베트가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배우의 나이가 좀 있어서 그런지, 뮤지컬 DVD 공연 실황에 나오는 '마야 하크포트의 엘리자베트'가 보여주는 이 장면에서의 느낌이 참 그럴듯하다.
엘리자베트 황후는 아들인 루돌프가 자기 때문에 죽었다고 자책하며, 깊은 슬픔에 빠져들고..(그러게, 있을 때 좀 잘할 것이지~) 그 때 나타난 죽음(토트)에게 '이젠 나도 좀 죽음의 세계로 데려 가 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이 때 죽음씨의 반응이 좀 생뚱맞다. 그 따위 모습(?)을 하고 있는 엘리자베트는 데리고 갈 수가 없다며, 그녀를 자기 세계로 데려 가길 거절한 것이다.
전반적인 극의 흐름을 살펴봤을 때 '죽음' 캐릭터는 1막 초반부부터 엘리자베트를 자신에게 오도록 하기 위해 별별 삽질을 다 하며 그녀의 '어린 딸'도 데려 가고, 외아들인 '루돌프'에게 접근하여 밑밥 깔아놓은 뒤 얼마 전엔 그가 황제에게 반항하도록 추동질하여 데리고 가지 않았는가-
그렇게.. 엘리자베트를 자신이 거하는 죽음의 세계로 이끌기 위해 루돌프를 선동하여 죽인 이 죽음이 막상 엘리자베트가 자진하여 '이젠 나를 데려가 주길 간절히 원하나이다~' 하니까 거절하는 건 또 무슨 이유인지..? ;; (애초에 '죽음'이란 자가 엘리자베트 아들인 루돌프에게 접근하여 그를 죽인 건, 엘리자베트 역시 자신에게 오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 아니었나?)
아들이 죽으면 엄마가 세상 다 산 것처럼 슬퍼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아무리 '죽음'이 '인간'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정도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 '죽음'이란 자는 오래 전 엘리자벳의 첫 딸이 죽었을 때 그녀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이미 한 번 목격한 적이 있었을테니 말이다. 헌데.. 본인이 엘리자베트 황후를 차지하기 위해 그 아들인 루돌프를 꼬득여서 죽였고, 그 '의도'대로 이젠 엘리자벳도 자신을 <죽음의 세계>로 데려가 달라며 자진해서 그(죽음)의 뜻을 따르겠다는데, 그 지점에서 뜬금없이 거절해 버리는 '죽음'이라니.. 이건 '스토리'적으로 뭔가 '앞뒤가 안 맞는 설정'인 듯하다.
Q. 이제껏 엘리자벳을 데려가기 위해 꾸준히 음모를 꾸미고 유혹해 왔던 '죽음'이 막상 그녀가 자진해서 '죽음의 세계'로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자, 거절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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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이 장면을 이해하려 들자면.. 그동안 그가 유혹하면서 들이댈 때마다 엘리자베트가 번번히 거절하기만 했으니, 거기에 맺힌 게 많았던 죽음 저도 '괜히 한 번 튕겨본 상황~'이라고 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뮤지컬 화자인 루케니가 다시 나와 '키치(Kitsch) 2'를 부르고 엘리자벳에 관한 '싸구려 상품들'이 여전히 오스트리아 내에서 판치고 있음을 시사하며, 또 다시 그녀를 비판하는 듯한 멘트를 한다.
'엘리자베트는 사실 굉장히 좋은 조건의 삶에서 살아간 여자였는데, 그런 그녀가 불행에 빠진 건 결국 본인이 이기적이고 별나서 그런 거다~' 뭐, 이런 뉘앙스이다. 루케니(Serkan Kaya)의 설명에 따르면 '루돌프가 죽은 이후에도 엘리자베트는 여전히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채 해외로 떠돌며 방랑 중'이고, 마누라 덕후인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그런 '방랑벽 중증의 부인 엘리자베트'의 뒤를 쫓으며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중'이라 한다.
어느 해변에서 드디어 엘리자베트(Maya Hakvoort)를 만난 '이젠 호호 할아버지가 된 프란츠 요제프 황제(Andre Bauer)'는 자신들이 맨 처음에 사랑해서 결혼했듯 여전히 '사랑'의 위대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부인인 엘리자베트에게 집으로 돌아와 달라 부탁한다. 아직까지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며... 하지만 엘리자베트는 사랑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말한다.
나이 60세 넘어서 그만큼 늙었으면 이젠 '방랑 생활(끊임없는 해외 여행질)'은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가서 '같이 늙어가는 남편' 옆에서 말동무도 해 주고 어린 손주들 재롱도 보면서 '노쇠한 요제프 황제'랑 서로 측은지심 가지고 의지하고 살면 좋으련만..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고, 집으로 돌아와 달라 부탁하는 황제를 끝까지 거부하는 엘리자베트가 개인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 여자의 머릿 속엔 도대체 뭐가 들어가 있는지 말이다..
하여튼 이 뮤지컬의 거의 끝부분인 이 '밤배/밤의 보트(Boote in der Nacht)' 장면에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후는 둘 다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하다가 또 헤어진다. 행복해지기가 어렵네, 뭣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둘이 '궁합'을 안 보고 결혼해서 그런 것일까? 이 '프란츠 요제프 & 엘리자베트 부부'는 몇 십 년 세월에 걸쳐, 평생을 어긋나기만 하는 참 '안타까운 커플' 같다.)
그렇게, 남편이 오스트리아에 있는 궁으로 돌아가잘 때 집에 안 가고 버티며 스위스 근방에서 또 '방랑 생활'을 지속하던 엘리자베트(Elisabeth)는 결국 아나키스트 루케니(Lucheni)의 칼에 찔려 사망하게 된다. 그러니까 '객사'에, 살벌한 '암살의 희생양'이 된 셈이다. 이것이, 19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 부인이었던 '역마살 낀 황후 엘리자베트'의 최후이다.
이 극 안에서, 이후 '화자인 루케니'가 또 등장하여 엘리자베트 일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혁명 세력에 의해 처형 당한 엘리자베트 시동생(요제프 황제의 동생 & 조피의 아들), 죽거나 정신병에 걸린 엘리자베트의 동생 등등 '불행한 최후'를 맞게 된 이 합스부르크 황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점점 침몰 중인 (실질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 시대(왕정 시대)'의 마지막 황제에 해당하는 '프란츠 요제프'는 악몽을 꾸고, 거기에서 '죽음'과 맞짱을 뜬다. 그 둘은 서로 '엘리자베트'는 자기 거라 주장하고.. 그 가운데, '죽음'은 드디어 때(무슨 때?)가 되었다며 자신이 죽음으로 그녀를 구원하겠다 큰 소리 친다. 끝까지 엘리자베트를 지키려 했던 요제프 황제는 안된다며 절규하지만, 그 가운데 죽음은 루케니(실제로 엘리자베트를 암살한 무정부주의자)를 향해 칼을 던지는데...
그 '판타지적인 설정'과 실제 '역사 속 사실'이 결합한 가운데, 다시 염라 대왕(이 뮤지컬의 첫 장면) 세계가 등장하고.. 엘리자벳을 왜 죽였느냐는 심문을 받던 루케니는 '자신이 원래 암살하려 했던 인물은 따로 있었으나 그가 나타나지 않았고, 마침 신문에서 오스트리아 황후인 엘리자베트가 스위스에 머문다는 기사를 읽고서 그 사람 대신 엘리자베트를 암살했다'고 고백한다.(그 때가 1898년)
(실제 역사 속 내용대로) 루케니는 배를 타려던 엘리자베트 황후에게 접근하여 자상을 입혔고, 급소를 찔린 엘리자베트는 그 후 많은 피를 흘린 채 사망하게 된다.(여기까지가 이 뮤지컬의 실질적인 스토리~) 이후 '에필로그 장면(Der Schleier fallt/베일이 벗겨지고..)'이 이어진다. 즉, 죽어서 저승 세계로 간 '엘리자베트'와 '죽음'이 부르는 이중창인 셈이다.
'죽음'은 무척 오랫동안 그녀를 기다려 왔다 말하고, '엘리자베트'는 입고 있던 검은 외투를 벗어던진 채 하얀 속옷 차림으로 그런 '죽음'에게 달려간다. 이제서야 삶에서 겪었던 여러 속박들을 벗어던지듯- 그런데.. 이 엘리자베트는 생전에도 '남편 & 자식 & 한 나라의 국모 자리' 다 내팽겨치고 제 마음대로 떠돌아 다니면서, 별로 속박 없이 살아간 여인네가 아니던가- ;;(새삼스럽다, 엘리자베트~)
어쟀든.. 본격적으로 육체의 속박을 벗어난 엘리자베트는 '살아있을 땐 맨날 귀찮아 하고 거부하기만 했던 그 죽음'에게 다가가 안기고, 이제서야 '진정한 안식'을 얻게 되었다며 기뻐한다.
여러모로 '이 뮤지컬 스토리 안에 나오는 죽음(Tod)은 엘리자베트(Elisabeth)가 일찌감치 죽으러 왔을 땐 안 받아들였다가, 그 이후에 그녀가 시집 가고 나자 그제서야 자기 꺼라 주장하며 몇 십 년간 꾸준히 들이대 왔던 삽질 캐릭터'이고.. 엘리자베트는 죽음씨가 꾸준~히 유혹할 때 진작에 따라 갔으면 본인이 원하는 그 '진정한(?) 안식'을 더 일찍 얻었을텐데, 실컷 '삶에서의 괴로움'을 맛보고 나서야 다시 죽음을 찾는 '뒷북 캐릭터'가 아닌가 싶다.(이 뮤지컬에 나오는 '스토리적인 논리'에 따르자면 그러하다..)
'죽음(Tod)'이 '이승에서의 삶에 불만 많았던 자신에게 진정한 자유와 안식을 준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엘리자베트(시씨)야 그렇다 치고, 이 <극의 논리> 안에서 죽음(Tod/토드) 캐릭터는 도대체 왜 자신의 세계로 진작에 들어온 '파릇파릇한 나이의 젊은이 엘리자베트'는 거부하고 '엘리자베트가 60세 넘은 할머니'가 되어서야 비로소 때가 되었다 말하며 루케니를 시켜 그녀의 목숨을 거둬간 것일까..?(혹시.. 이 극에 나오는 '죽음' 캐릭터는 할머니 덕후? ;;)
실질적으론 '죽음' 자체가 추상 명사이지만 그것을 '의인화 된 하나의 캐릭터'로서 스토리를 이어가는 이상, 향후에 뮤지컬 <엘리자베트(Elisabeth)>를 무대에 올린다면 '극을 만드는 입장'에서 그 부분에 관한 '캐릭터적인 & 스토리적인 면에서의 개연성'에 대해 조금 고민을 해봐야 될 것 같다..
이 뮤지컬 판본 비교의 '기본 잣대'가 되는 2005년 빈 공연 실황(DVD)에선, 터키 출신의 세르칸 카야(Serkan Kaya)가 '루케니' 역을 아주 멋지게 소화해 냈다. 그래서 먼 나라 사람들에게도 크게 호평 받았던... 무엇보다, 이 극에 나오는 '루케니'는 캐릭터 자체로 앞뒤가 맞는 등장 인물이기도 하다.
엘리자벳 암살자이자 이 극의 화자인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루케니'는 <별로 하는 일 없이 부당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상류층 & 현 체제>에 불만 갖고 있는 사람이었던 듯하고, 그가 엘리자베트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자세한 이력은 모르고 있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국민들 노동의 대가로 먹고 놀면서 해외 여행 다니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라니까 그런 엘리자벳을 암살했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애초의 암살 타겟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루케니의 그 행동 자체에 명분이나 개연성이 없는 건 아닌 것이다.
엘리자베트 황후를 살해한 혐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힌 '루케니'가 복역 중 스스로 목을 매는 씬이 뮤지컬 <엘리자베트>의 마지막 장면이다. 비록 조연이지만,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극의 화자인 '그랭구아르'가 캐릭터 자체로 꽤나 인기 많았던 것처럼 오스트리아 뮤지컬 <엘리자베트>에서도 극의 화자인 '루케니' 캐릭터는 무척 매력적인 등장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해당 캐릭터의 그 미덕을 잘 살리려면, 무엇보다 그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의 역량'이 중요하다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