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 폴리스

억울한 '의자왕', 낙화암 '3천 궁녀'설은 허구?

타라 2011. 7. 26. 16:37
90년대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조선 시대' 사극이 주류를 이뤘었지만, 언젠가부턴 그 이전 시대를 다룬 사극도 많이 제작되고 있다. 특히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 시대>물을 빈번하게 볼 수 있는데, 같은 시기에 공존했던 인물들 경우 '한 쪽 국가의 인물'이 주인공이 되면 '상대 국가의 인물'은 그에 대적하는 캐릭터이거나 주변 인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각각의 '입장'이 이러하듯 다 '상대적'인 것이다.

어제 첫 방송된 '백제 시대' 배경의 사극 <계백>의 경우에도 '그 안에 나오는 등장 인물'들 중 이전에 방영되었던 다른 드라마 캐릭터와 겹치는 인물이 있는데, 주인공 '계백'의 경우만 봐도 재작년 드라마 <선덕 여왕> 후반부에 조연 캐릭터로 잠깐 나온 적이 있다.(최원영-계백)

2009년에 방영된 <선덕 여왕>은 '신라'를 배경으로 한 사극이었기에, 그에 대적했던 '백제' 사람은 비중 낮은 주변 인물로 처리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엔 백제의 그 <계백>을 아예 주인공으로 설정한 사극이 탄생했다. 주인공 캐릭터가 '백제인'인 관계로, 예전 <선덕 여왕>에서 주요 캐릭터로 나왔던 신라의 '실존 인물'들이 이 드라마에선 주변 인물로 처리되지 않을까 싶다.

2009' <선덕 여왕>에서의 계백(최원영) / 2011' <계백>에서의 계백(이서진)

같은 백제인 내에서도 선화 공주를 아내로 맞아들인 '무왕'은 그 자체로 또 다른 극에서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인물인데, 이번 드라마 <계백>에선 조연 포지션을 담당하고 있다. '무왕(최종환)' 다음 왕인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조재현)'은 이 극에서 꽤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인 듯하다.

보통 '의자왕' 하면, 많은 사람들이 '3천 궁녀설'을 떠올리곤 한다. 그가 주색에 빠져 삼천 궁녀를 데리고 놀다가 나라를 멸망케 했다는 '의자왕의 방탕함'을 뒷받침해 주는 이야기인데, 사실 그것은 '승자에 의해 기록되는 역사' 속에서 부풀려진 대목이 많은 <허구>에 불과하다-

예전에 방영된 국내 사극 <연개소문>이 '3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이상한 CG로 처리하여 '드라마계 병맛 CG'로 회자되곤 하는데, 그 극에서의 많은 설정 자체가 '역사 왜곡'이 심한 데다가 애초에 '의자왕과 3천 궁녀설'은 검증되지 않은 역사적 사실이기에, 대략 난감한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백제 멸망 당시 '여러 비빈과 궁녀들'이 강에 투신 자살한 것은 사실로 밝혀졌으나, 그 구체적인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시기에,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엔 45,000여 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었고 2,500여 명의 군대가 존재했으며, 상식적으로 그런 부여의 궁 안에서 3,000명이나 되는 궁녀를 먹여 살리는 건 불가능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의 황궁 안엔 3천 명이나 되는 궁녀를 수용할 만한 공간이 없었다.

익히 알려진 '백제 의자왕의 삼천 궁녀설'은 야사 or 픽션에 해당하는 소설에 나온 내용일 뿐, 역사서엔 '의자왕의 궁녀가 3,000명이었다거나 그들이 단체로 낙화암에 투신했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신라'가 삼국 통일을 하게 되었고 '백제' 마지막 왕인 31대 '의자왕'은 신라와의 싸움에서 패한 왕, 즉 '역사의 패자'이기에 '승자'의 입김에 의해 의자왕이란 인물이 다소 폄하된 게 아닌가 싶다. 실제로 백제 무왕의 아들이었던 '의자왕'은 효심이 깊고 형제들 하고도 잘 지냈던 인물로, 한 때 백성들을 향해 선정을 베풀고 나라의 부강을 위해 힘쓴 자애로운 왕이었다고 한다.


그랬던 백제가 결국 멸망하게 된 것은 '신라와 당의 연합'에 미리 대처하지 못한 탓과 복잡한 주변 정세의 영향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2009년에 방영된 국내 드라마 <선덕 여왕>에서.. 순재옹(진흥왕)이 말했던 그 '불가능한 꿈'을 김유신과 김춘추가 결국 '가능한 꿈'으로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결국 '역사의 승자'가 된 신라 쪽의 폄하도 있지만, 일제 강점기 때의 여러 사학자들이 허구인 '의자왕과 3천 궁녀설'을 강조하며 의도적으로 '백제'를 깎아 내리기도 했다.

결국 '나당 연합군'에 패했지만, 백제의 마지막 군주 '의자왕'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던 걸로 전해진다. 하지만 결국 백제가 망했기에, 그는 당나라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 '의자왕'이 나당 연합군에 맞서던 당시, 충분히 그 싸움에서의 승산이 있었으나 '당나라로 가서 출세하게 된 백제 신하 예식'이 조국과 왕을 배신하고 백제를 망하게 했다는 주장이 최근에 제기되고 있다.

그러니까, 백제의 이 '예식 장군'이 '조선 말기 때 일본에 빌붙어 나라 팔아먹은 간신배'와 비슷한 인물인 것이다. 실제로 '예식'은 조국인 백제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충성하여 백제 멸망 후에도 '당의 높은 관직'에 올라 부귀영화를 누리며 잘 살았다고 한다. 거의 '상식'과 비슷한 수준으로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의자왕과 3,000 궁녀설'은 역사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허구'일 뿐이다. 당시의 백제는 의자왕이 방탕해서 망한 게 아니라 '믿었던 측근인 예식'에게 배신 당해서 망하게 된 것 같은데, 후대에까지 안 좋은 허구설로 이름 알리게 된 백제 '의자왕'은 여러 면에서 참 억울한 왕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