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앞에서 2013.04.01 15:42

그저께 문득, 소리 소문 없이 나의 시야에서 사라져 간 것들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무대 앞장에 단역이나 조연으로 출연했다가 자기 역할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간 수많은 '사람'들과 사회의 변화에 따라 잠시 출연했던 '현상', '사물', 여러 종류의 '생물' 등등...

언젠가부터 흙길이나 돌길, 모랫길을 걸어다니는 게 뜸해졌는데, 소시 적엔 비 오는 아침이 되면 모래로 된 학교 운동장이 온통 지렁이 천지였었다. 얼마 전, 다른 연관된 기억을 떠올리다가 그 '지렁이'를 본 지 한 백 만년 된 것 같단 생각을 갑작스레 하게 되었다.

아울러 벌, 잠자리, 매미, 딱정 벌레, 귀뚜라미, 나비 등의 곤충을 구경한 지도 너무나 오래 되었다. 나비 류의 '변신 전 단계'인 번데기는 음식점 같은 데서 가끔 구경하곤 하지만... 어린 시절엔 학교 방학 숙제로 '곤충 채집'을 하기도 했었고, 남학생들이 일부러 벌 같은 걸 잡아와서 여학생들에게 들이대며 짓궂게 놀리기도 했었다. '벌'은 좀 무섭지만 '나비'나 '잠자리'는 내게도 꽤 친숙한 존재였었는데, 보통 '가을'은 잠자리 & '봄'은 나비의 계절로 인식되어 있다.


지금이 '봄'이라 지나다니면서 '꽃'은 종종 구경하지만, 어렸을 때 자주 봤던 형형색색의 '나비'는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하다 못해, 그 비슷하게 생긴 나방이라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헌데.. 그것들을 자주 봤을 당시, 대체로 나비는 '호감'/나방은 '비호감'의 존재였었다.) 내가 자연과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어서 오랫동안 나비의 그림자조차 구경 못하는 것일까, 아님 요즘엔 나비가 흔하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도 쉽게 못보는 것일까..?

나비와 같은 곤충은 동양화의 소재로도 많이 쓰였는데, '서양화'에도 가끔 출몰하지만 '나비'는 전반적으로 '동양화'와 씽크로가 더 잘 맞는 것 같다. 조선 후기 화가로 알려진 '남계우'의 경우엔, 평생동안 '나비' 관련 그림만 그리기도 했다. 그의 그림엔 '꽃'도 등장하지만 주로 '나비'를 빛내주기 위한 조연 정도의 역할인 것 같고, 남계우 화백의 주된 관심사는 '나비'였던 것 같다. '나비 전문 화가'인 셈이다..


[ '남호접(南蝴蝶)'이라 불렸던 조선 후기 선비 화가 '남계우(南啓宇)'의 '나비' 소재 동양화 ]



유난히 '나비'를 좋아하고 그것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에 많은 열정을 기울인 19세기 조선 화가 남계우에겐 '
남나비' or '남호접(南蝴蝶)'이란 별칭이 따라 붙었다.

사대부 가문 출신의 선비 화가 남계우(南啓宇)는 나비를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평소에 수많은 나비들을 채집하여 열심히 관찰했으며, 실물 나비로 본을 뜬 후 그 위에 채색을 했다고 한다. 비교적 여유 있는 화가였는지라, 채색할 때 금가루나 진주 가루 등 귀한 재료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의 사실적인 '나비' 그림은 후대 생물학자들에게 '학문적 자료'로 그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고 한다.

서양의 어떤 화가가 일생동안 '고양이' 그림에만 몰두했듯, 조선 말기의 남계우(南啓宇) 화백 역시 '나비'를 제대로 묘사하는 데에 온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 외에도, 알려진 예술가들 중엔 본인이 관심 있어 하는 '한 가지 소재'만 집중적으로 작품화 한 이들이 종종 눈에 띈다. 요즘 들어 '나름 만능이랍시고 이것 집적, 저것 집적~하지만 정작 깊이는 없는 대중 문화 종사자'들이 많이 눈에 띄다 보니, 때론 이렇게 '진득하게 한 우물만 파는 이'들의 가치가 무척 귀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posted by 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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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Edit/Del  Reply 프시케

    아~~ 나비가...
    넘 아름다워요.
    타라님 덕분에 멋진 작품과 남계우님을 알게 되었네요.

    2011.05.21 18:21
    •  Addr  Edit/Del Favicon of https://prorok.tistory.com BlogIcon 타라

      저 분위기랑 좀 안 어울리지만, 나비 하면
      '나비야, 나비야.. 이리 날/아/오/너/라~'
      하는 가사의 동요도 떠오르더군요.. ^^;

      봄 되니까 유려한 몸짓의 나비가 보고싶어집니다..
      실물은 아니지만, 남계우 화백의 그림으로 대신해야
      되겠어요.. ^^

      2011.05.21 18:37 신고
  2.  Addr  Edit/Del  Reply 하나비

    화가의 남다른 한우물 파기로 열을와 재능을 새겨보고갑니다 ..

    2011.05.21 20:00
    •  Addr  Edit/Del Favicon of https://prorok.tistory.com BlogIcon 타라

      여기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구요,
      주말 즐겁게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

      2011.05.21 20:05 신고
  3.  Addr  Edit/Del  Reply 귀여운걸

    마치 살아서 나올것 같은 느낌..
    너무 아름답네요^^

    2011.05.21 20:03
    •  Addr  Edit/Del Favicon of https://prorok.tistory.com BlogIcon 타라

      곤충이지만, 나비에겐 특유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

      2011.05.21 20:05 신고
  4.  Addr  Edit/Del  Reply 클라우드

    감사히 읽고 갑니다.
    글을 읽으면서 뇌리속에서 스쳐가는 한 분이 계세요.
    일제 암흑기 시대에 곤충학 부문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셨던 석주명.^^
    늘 감사히 배우고 가요.
    주말 밤,행복하시길 바랍니다.^^

    2011.05.21 20:36
    •  Addr  Edit/Del Favicon of https://prorok.tistory.com BlogIcon 타라

      그런 사람들의 삶이야말로, 정말 가치 있어 보입니다..
      특정한 학문에서 많은 발견을 이루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새로운 걸 알게 해주는 분들.. 정말 멋져 보여요~ ^^

      2011.05.23 01:09 신고
  5.  Addr  Edit/Del  Reply Favicon of https://shain.tistory.com BlogIcon Shain

    전 나비하니까 ... 자연스레 고양이가 떠오르네요
    고양이를 나비라 불러서 그런지..
    묘작도의 참새 대신 나비가 어울리는 느낌이라 그런지 ^^
    하튼 특별한 화가인듯 합니다

    2011.05.22 11:19 신고
    •  Addr  Edit/Del Favicon of https://prorok.tistory.com BlogIcon 타라

      요즘엔 좀 뜸하지만, 예전엔 고양이에게
      '나비야~' 하고 부르는 경우를 직접 본다거나
      책 같은 데서 종종 접했던 기억이 납니다.. ^^

      2011.05.23 01:12 신고
  6.  Addr  Edit/Del  Reply Favicon of http://simglorious.tistory.com BlogIcon 도플파란

    한 우물파는 사람도 점점 드물어져 가고 있죠.. ㅎㅎ 저도 한우물만 파야하는데.. 자꾸.. 옆 학문이 같이 땡기네요..ㅠㅠ

    2011.05.22 11:35 신고
    •  Addr  Edit/Del Favicon of https://prorok.tistory.com BlogIcon 타라

      대체로, 한 우물 파는 것도 쉽진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리 한 사람들'이 더 가치 있어 보이기도
      하구요.. ^^;

      2011.05.23 01:13 신고
  7.  Addr  Edit/Del  Reply Favicon of https://shiningway.tistory.com BlogIcon 화비랑

    전 나비하니까 '호접몽'이 생각나네요. 김기덕 감독의 '비몽'도 인상깊게 봐서인지 그 생각도 나고요. 나비 그림이 참 예쁘네요. 저도 나비는 서양화보단 동양화에 더 어울린다는 타라님의 생각에 동의한답니다.
    지나가다가 좋은 그림과 화가도 알게 되었네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

    2011.05.22 14:08 신고
    •  Addr  Edit/Del Favicon of https://prorok.tistory.com BlogIcon 타라

      저두, 어제 포스팅 하면서 그걸 떠올렸다지요..
      장자의 꿈 이야기와 비슷하게, 거의 매일 밤
      꿈을 꾸는 저두 '꿈 속의 현실'이 진짜인지..
      아님 '지금의 이 현실'이 진짜 세계인지, 가끔
      헷갈리더라구요.. ^^;

      2011.05.23 01:15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