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화(李月華)의 본명은 이정숙(李貞淑)이며(그녀의 본명은 '홍소정'이란 주장도 있음), 1904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출생과 성장에 관해선 갖가지 카더라설이 난무한다.(그녀의 친부모나 정확한 출생 시기가 애매하고, 데뷔 전 기생이었다는 설, 이화 학당을 다녔다는 설 등..) 그녀는 1918년 신파 극단 '신극좌'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 여성 멤버들로만 구성된 '여명 극단'에 들어갔다.
1922년 윤백남이 만든 '민중 극단'에 입단한 그녀는 이 시기부터 '월화'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활동했다. 이곳에서 <사랑의 싹> <진시황> <영겁의 처> 등 여러 작품을 거치면서 힘든 배우 생활을 건뎌낸 이월화(李月華)는 그 때부터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월화는 '연극'에 이어 윤백남 연출의 '영화' <월하의 맹세(조선 최초의 극 영화)>에 출연하면서 유명해졌고, 1920년대 우리 나라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가 되었다. 당시로써 '여배우'가 영화에 등장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스무 살 꽃같은 나이에 매력적인 용모로 뭇 남성들을 매혹시킨 이월화는 장안의 '모던 걸'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 후 토월회(土月會)에서 활약했던 이월화는 첫 공연은 실패했지만, 1923년에 공연된 신극 <부활>에선 '카추샤' 역을 맡아 큰 호응을 얻게 되면서 토월회의 간판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알트 하이델베르크> <카르멘> 등의 공연에서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1924년 조선 키네마의 창립 영화 <해의 비곡(海의 秘曲)>에 출연한 이월화는 신인 여배우 이채전에 밀려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토월회를 이끈 박승희와의 사랑에 실패한 일로 큰 상처를 받고 극단 활동을 그만 두게 되며, 1925년 이후론 인기도 서서히 떨어지면서 이월화(李月華)의 연기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월화는 1927년엔 영화 <뿔빠진 황소>, 1928년엔 <지나가(支那街)의 비밀>에 조연으로 출연했는데,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었다. 1929년 여배우들로만 구성된 '오양 가극단'을 창단했으나 극단 운영에 실패한 그녀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댄서로 활동했으며(1931년), 그곳에서 일본계 중국인과 결혼했다.
상하이에서의 결혼 생활 중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귀국했던 이월화(李月華)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일본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당시, 그녀의 죽음에 관해 '현해탄 투신 자살' or '음독 자살'이란 소문이 떠돌기도 했었다..)
이월화는 '연극'에 이어 윤백남 연출의 '영화' <월하의 맹세(조선 최초의 극 영화)>에 출연하면서 유명해졌고, 1920년대 우리 나라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가 되었다. 당시로써 '여배우'가 영화에 등장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스무 살 꽃같은 나이에 매력적인 용모로 뭇 남성들을 매혹시킨 이월화는 장안의 '모던 걸'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 후 토월회(土月會)에서 활약했던 이월화는 첫 공연은 실패했지만, 1923년에 공연된 신극 <부활>에선 '카추샤' 역을 맡아 큰 호응을 얻게 되면서 토월회의 간판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알트 하이델베르크> <카르멘> 등의 공연에서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1924년 조선 키네마의 창립 영화 <해의 비곡(海의 秘曲)>에 출연한 이월화는 신인 여배우 이채전에 밀려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토월회를 이끈 박승희와의 사랑에 실패한 일로 큰 상처를 받고 극단 활동을 그만 두게 되며, 1925년 이후론 인기도 서서히 떨어지면서 이월화(李月華)의 연기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월화는 1927년엔 영화 <뿔빠진 황소>, 1928년엔 <지나가(支那街)의 비밀>에 조연으로 출연했는데,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었다. 1929년 여배우들로만 구성된 '오양 가극단'을 창단했으나 극단 운영에 실패한 그녀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댄서로 활동했으며(1931년), 그곳에서 일본계 중국인과 결혼했다.
상하이에서의 결혼 생활 중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귀국했던 이월화(李月華)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일본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당시, 그녀의 죽음에 관해 '현해탄 투신 자살' or '음독 자살'이란 소문이 떠돌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