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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출신, 한국 극 영화 최초의 여배우 : 이월화

타라 2010. 8. 26. 21:43
이월화(李月華)의 본명은 이정숙(李貞淑)이며(그녀의 본명은 '홍소정'이란 주장도 있음), 1904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출생과 성장에 관해선 갖가지 카더라설이 난무한다.(그녀의 친부모나 정확한 출생 시기가 애매하고, 데뷔 전 기생이었다는 설, 이화 학당을 다녔다는 설 등..) 그녀는 1918년 신파 극단 '신극좌'에서 활동하다가, 1921년 여성 멤버들로만 구성된 '여명 극단'에 들어갔다.

이월화(1904~1933)


1922년 윤백남이 만든 '민중 극단'에 입단한 그녀는 이 시기부터 '월화'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여 활동했다. 이곳에서 <사랑의 싹> <진시황> <영겁의 처> 등 여러 작품을 거치면서 힘든 배우 생활을 건뎌낸 이월화(李月華)는 그 때부터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했다.

이월화, 스무 살 무렵 때의 모습


이월화는 '연극'에 이어 윤백남 연출의 '영화' <월하의 맹세(조선 최초의 극 영화)>에 출연하면서 유명해졌고, 1920년대 우리 나라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가 되었다. 당시로써 '여배우'가 영화에 등장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스무 살 꽃같은 나이에 매력적인 용모로 뭇 남성들을 매혹시킨 이월화는 장안의 '모던 걸'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그 후 토월회(土月會)에서 활약했던 이월화는 첫 공연은 실패했지만, 1923년에 공연된 신극 <부활>에선 '카추샤' 역을 맡아 큰 호응을 얻게 되면서 토월회의 간판 스타로 떠오르게 된다. 이후 <알트 하이델베르크> <카르멘> 등의 공연에서 주연을 맡았다.

전문 극단 '토월회(土月會)' 창립 멤버들


하지만 1924년 조선 키네마의 창립 영화 <해의 비곡(海의 秘曲)>에 출연한 이월화는 신인 여배우 이채전에 밀려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토월회를 이끈 박승희와의 사랑에 실패한 일로 큰 상처를 받고 극단 활동을 그만 두게 되며, 1925년 이후론 인기도 서서히 떨어지면서 이월화(李月華)의 연기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이월화는 1927년엔 영화 <뿔빠진 황소>, 1928년엔 <지나가(支那街)의 비밀>에 조연으로 출연했는데,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출연작이 되었다. 1929년 여배우들로만 구성된 '오양 가극단'을 창단했으나 극단 운영에 실패한 그녀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댄서로 활동했으며(1931년), 그곳에서 일본계 중국인과 결혼했다.

상하이에서의 결혼 생활 중 모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귀국했던 이월화(李月華)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일본에서 심장 마비로 사망하였다.(당시, 그녀의 죽음에 관해 '현해탄 투신 자살' or '음독 자살'이란 소문이 떠돌기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