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한 시각으로 풀어 나가는 미하엘 쿤체의 '엘리자베트(엘리자벳) 황후' 이야기
그런데.. 실제 기록에서든, 뮤지컬에서든 막상 <엘리자벳>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 주인공인 엘리자베트(씨씨 황후)보다 그녀 주변인들이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름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는데.. 세상엔 그보다 훨씬 못 누리고 힘들게 살다 갔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도 압도적으로 참 많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엘리자베트(Elisabeth) 황후의 그 삶이 그리 안됐다거나 비극적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 인물은 그 뭐랄까.. 우리 나라 드라마 <사랑과 야망>에 나오는 '미자'의 경우처럼 자신의 타고난 기질(+환경의 영향 조금) 때문에 '실제 본인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그리 나쁘지 않음에도, 스스로 제 인생에 만족 못해서 자기 자신을 들들 볶으며 살았던 케이스'가 아니었나 싶다.
성장기 때의 엘리자베트(엘리자벳)는 나름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그리 까탈스럽지 않은 부모가 방목(?)해서 키운 탓에 자유분방한 말괄량이 아가씨로 지낼 수 있었다. 감수성도 풍부하고, 상상력도 뛰어난 낭만적 기질의 처자로... 그러다가, 그랬던 엘리자베트 인생에 본격적으로 태클이 걸린 것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 시집간 뒤 그 시어머니와 '고부 간의 갈등'을 겪게 되면서부터다. 하지만 '고부 간의 갈등'은 그로부터 또 많은 세월이 지난 현대의 많은 기혼 여성들도 다반사로 겪는 일이다.
타고난 기질 차이, 입장 차이에 따른 고부(황후와 황제 엄마) 간의 갈등
무엇보다 엘리자베트(엘리자벳) 황후의 시어머니인 조피(소피) 대공비가 무슨 드라마 & 소설 <겨울새>에 나오는 엽기적인 시어머니처럼 '난 우리 며느리를 괴롭히고야 말테다~' 하면서 의도적으로 그녀를 괴롭혔던 고약한 시어머니가 아니라, 그냥 서로간의 <입장 차이> 때문에 갈등을 겪게 된 양상이 강하다.
사실.. 원래 집안끼리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상대, 즉 황후감으로 점찍어 둔 것은 엘리자벳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인 헬레네였고 그 '엘리자벳 언니인 헬레네'는 황후가 되기 위한 수업을 몇 년동안 착실하게 받았다고 한다. 그랬던 그들의 결혼이 파토 나고, 결국 엘리자베트가 황후가 된 것은 요제프 황제가 원래 자신의 정혼자였던 헬레네가 아닌 동생 엘리자베트에게 반했기 때문이다.(그렇다고, 헬레네가 얼굴이 못생긴 건 아니다. 다만, 제 눈에 안경이라고나 할까..?)
'몇 년간 신부 수업해 온 언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에 대한 대가는 혹독했다
이런 저런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엘리자베트는 병에 걸려 고생하고, 그녀가 어린 나이에 시집 와서 애를 낳자 시어머니 소피는 병약하고 뭣 모르는 며느리에게 애를 맡길 수 없다 하여 자신의 주관 하에 엘리자벳의 애를 키우고... 그 때문에, 양육권을 빼앗긴 며느리는 더더욱 환장하고.. 그 와중에, 씨씨(엘리자베트) 황후가 우겨서 남편 헝가리 출장 때 데리고 간 애들 중 큰 딸이 병에 걸려 사망하자 시어머니 조피는 더더욱 그런 며느리에게 애를 맡길 수가 없다며 낳는 족족 다 뺏어갔다.
며느리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너무 안된 일이지만, 시어머니는 또 시어머니대로의 '입장'이 있었던 듯하다. 어찌 보면, 엘리자베트가 애초에 '그간 열심히 신부(황후) 수업 받아 온 자기 언니'를 물 먹이고 황후 자리에 앉은 것 자체로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상황 같기도 하고...
게다가 '미모의 부인'인 엘리자베트 덕후였던 프란츠 요제프 황제(엘리자베트의 남편)는 나중에 엘리자베트 황후가 도저히 못 참겠다며 '엄격한 시어머니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다'는 자유 선언을 하자, 나름 그 부탁을 들어줬던 것 같다. 결국 엘리자베트 황후는 양육권도 되찾게 되고, 말년의 소피 대공비(엘리자베트의 시어머니)는 그 영향력이 약해져서 조용히 지내기도 하였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 : 맞지 않는 자리에 앉은 것에 대한 연쇄 상극 작용
한 나라의 황후이니 먹고 사는 걱정 없이 꽤나 화려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고, 남편인 황제는 그 나름대로 애처가였으며, 어느 정도의 문학적 소양과 재능이 있었던 지적인 엘리자베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못마땅한 게 많았는지, 사랑을 갈구하는 아들은 내팽겨친 채 '나는 자유롭게 살테야~' 하면서 계속 외국으로만 떠돌며 방황했다고 한다.(살짝 '국고 탕진'스런 상황~)
크고 작은 인생의 굴곡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소유하거나 누릴 수 있는 것들 중에 '남들이 평생 누리지 못할 좋은 것들'이 꽤 많았음에도,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만족을 느껴보려 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침잠하고 바깥으로만 떠돌며 외롭고 고단하게 살았던 것'은 결국 엘리자베트 본인의 탓이 아닐까 한다. 4명의 자식들 중, 자신이 직접 키운 막내 딸만 유난히 편애하며 아들 루돌프 황태자를 좀 외롭게 만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중에 극강의 상황으로 몰려 자살한 유약한 루돌프의 죽음엔 그녀의 영향도 좀 있었던 듯하다.
어쨌든 엘리자베트 황후에 관한 실제 기록이나 오스트리아 뮤지컬 <엘리자베트>를 보다 보면, 정작 그녀 보다는 '부인이 언젠가부턴 황후로서의 임무를 다하지 않고 계속 외국으로만 떠돌아서 외로웠을 엘리자벳 남편 요제프 황제, 엄마와 가장 닮은 기질을 지녔지만 결국 엄마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컸던 예민한 루돌프 황태자 등 그녀 주변인들이 더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뮤지컬 '엘리자베트'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루케니?
뮤지컬 <엘리자베트> DVD(빈 공연 실황)를 보다 보면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이 '엘리자베트 암살자이자 이 극의 화자인 루케니(Serkan Kaya)'와 '엘리자베트 시어머니인 조피(Else Ludwig)'인데, 이 배우들이 연기를 참 잘해서인지 무척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황실의 지엄한 법도를 강요하며 엘리자벳에게 엄격했던 엘제 루드비히(Else Ludwig)표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는 보다 보면 은근히 귀엽고 애잔한 구석이 있으며, 이 뮤지컬에서 거의 '엘리자베트 안티'에 가까운 세르칸 카야(Serkan Kaya)표 루케니는 '실제로도 살짝 이기적으로 살았던 엘리자벳'에 비해 (관객 입장에서) 더 '감정 이입'이 잘되는 인물이다.
극을 이끌어 가는 '화자' 역할이면 이 작품을 쓴 작가의 입장을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무정부주의자 '루케니'를 이 뮤지컬 '나레이터'로 내세운 걸 보면 극작가 미하엘 쿤체(Michael Kunze) 역시 '엘리자벳 황후에 대한 무분별한 우상화'를 못마땅해 하는 일부 대중들처럼 그녀에 대해 다소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실존 인물' 주인공에 대해, 그런 식의 '객관적인 태도'를 내비치며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 나가는 건 이 뮤지컬의 장점이기도 하다.
사실.. 꽤나 불만족스런 삶을 살아야 했던 엘리자베트(씨씨)에겐 좀 미안한 일이지만, 가질 만큼 충분히 가지고 있는 데다가 남들보다 수십 수백 배로 '화려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이 '난 외로워. 나 정말 힘들어 미치겠어~' 하는 것도 그리 좋아보이진 않는다. 어느 정도는 자기 노력할 탓이니... 거기다, 그녀는 미모도 괜찮은 편이고 남편의 지극한 사랑도 받지 않았는가-
시대를 한발 짝 반이나 앞서서 태어난 '강한 에고의 자유 영혼' 씨씨(엘리자베트)
세상엔 뼈 빠지게 일해도 '돈 없어서 해외 여행 못 다니는 사람들'도 참 많은데, 엘리자베트는 자기가 노동을 해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면서 단순히 황후란 이유로 '국가 재산으로 자유롭게 실컷 유럽 여행'도 다니고 했으니.. 게다가 장년 이후론 황후로서의 의무감 갖은 건 다 내팽켜 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떠돌아 다니며 생활했으니, 그녀의 삶이 영 비극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이 씨씨 황후(엘리자베트)의 삶에서 그나마 가장 비극적인 대목이라면, 이 인물은 '현대 여성으로 태어났으면 딱 좋았을텐데 시대를 너무 앞서서 태어났다는 점'~ 또, 오스트리아 황제 자리에 앉아 있는 잘생긴 이종 사촌(프란츠 요제프) 오빠가 자기 좋다고 하니까 '원래의 자기 기질과 별로 맞지 않음에도 너무 쉽게 그 황후 자리를 덥썩 물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아.. 물론 황제가 청혼한 거여서 거절할 수 없었겠지만, 그래두 '이종 사촌'지간인데 그 청혼을 안 받아들였다고 해서 설마 황제가 '엘리자벳 가족'을 죽이기야 했을까 싶다. ;; 아무리 황제의 청혼'이라도, 세상에 '예외'는 있는 법이니까... 예전에 <제중원>이란 국내 드라마에서 그런 류의 '예외 상황'을 다룬 적이 있다. 원래는 '중인'이 뼈대 있는 '양반' 집안의 청혼을 거절하면 안되는데, 그 양반이 그래두 인격적으로 괜찮은 사람이어서 모욕적인 '청혼 거부'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 집에 딱히 해꼬지하지 않았던...)
원래 황후 수업을 받았던 '언니'를 대신하여 어울리지 않는 자리로 시집 가는 바람에 '시댁'과 '자기 자신' 모두를 힘들게 했던 '시씨(Sissi)=엘리자베트(Elisabeth)'는 평생 결혼 안하고 자기 하고싶은 일 하면서 자유분방하게 사는 '독신'으로 지내거나, 굳이 결혼을 한다 쳤을 때 '한 나라를 이끌어 가는 황제' 가 아닌 '그보다 평범한 집'에 시집 갔다면 더 만족스럽게 잘 살았을 여인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