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네의 시 '로렐라이' 중 일부
저기 저 언덕 위에, 신비롭게도
아릿따운 아가씨가 앉아
금빛 장신구를 반짝이며
황금빛 머리칼을 빗어 내리네..
132미터에 달하는 높은 절벽 '로렐라이'는 라인강 기슭 중에서도 폭이 좁고 휘어있는 곳에 위치한 데다가, 물살이 거세어 이곳을 지나다니는 뱃사람들에겐 무척 위험한 장소였다.
그 옛날.. 어둑해지는 저녁 무렵에 뱃사공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로렐라이 언덕 위에서 황금빛 머리칼을 지닌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나타나 곱디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 신비로운 노래를 듣던 뱃사공이 그녀의 미모에 눈을 떼지 못하며 한 눈 파는 사이, 배는 암초에 걸리거나 거센 물살에 휩쓸려 가 사공들이 목숨을 잃는 사례들이 많았다.
무척 매혹적이고 아릿따운 여인이긴 하나, 전설 속에 나오는 그녀는 많은 멀쩡한 남자들을 파멸의 길로 이끌었던 '팜므 파탈'인 셈이다. 여러 문학가들에 의해 조금씩 살이 붙어 만들어진 이 '가공의 이야기'는 훗날 전설처럼 굳어졌고, 하이네의 시에 여러 작곡가들이 곡을 붙임으로써 더더욱 유명해졌다.
이 '로렐라이'에 얽힌 전설은 신화 속 '세이렌' 이야기 하고도 유사한 점이 많다. 많은 서양 화가들이 그것을 소재로 한 그림을 남기기도 했는데, 정서 상으론 '세이렌' 전설이 조금 더 무시무시한 느낌을 준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 '세이렌'
신화 속에 나오는 세이렌은 '상반신-사람/하반신-새 or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아름다운 '바다의 요정(or 정령)'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인어'의 모습과 비슷하다. 지중해의 섬에 살고 있던 그녀는 그곳에 뱃사람이 지나가면 신비로운 음악으로 그들을 유혹하여 바다에 빠져 죽게 했다고 전해진다. 때론 잡아먹기도 했다는..;; '경보'의 의미를 지닌 'siren'이란 영어도 이것에서 유래된 단어라고 한다.
많은 남정네들의 목숨을 앗아간 아름다운 마녀 '세이렌(seiren)'이 사라지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설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그 중 '오르페우스(Orpheus)'와 관련한 일화는 아주 흥미롭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하프의 달인 '오르페우스'는 우리가 음악 관련 수업을 들으면서도 한 번 쯤 들어봤음직한 이름이다. 시인이자 재능 있는 음악가였던 오르페우스(Orpheus)가 한 날은 볼 일 보러 배를 타고 가던 중, 매혹적인 세이렌(seiren)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보통의 남자들 같으면 그 유혹에 넘어가 죽음을 맞게 되지만, 오르페우스는 세이렌이 들려준 음악보다 한층 더 아름다운 곡으로 맞대응을 하였고 그에 자존심 상한 세이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유혹 전문 '세이렌'은 상대방이 자신의 유혹에 넘어오지 않으면 스스로 사라지는 게 원칙이었다고 함)
분명 지나다니는 남자들을 유혹하여 목숨을 잃게 만드는 '세이렌'은 나쁜 존재이지만, 한 때 동화 <인어 공주>에 대한 '결말 트라우마'가 있었던 탓에 이 세이렌 인어에게 큰 매력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
에드워드 번 존스의 그림 '바다의 심연'
만일 이 '세이렌'이 안데르센 동화 <인어 공주> 속 여주인공처럼 어떤 인간 왕자를 보구 사랑에 빠졌다면, 결말에 혼자 물거품 되어 희생하지 않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절대 이웃 나라 공주와 결혼하는 꼴을 볼 수 없다'며 그를 데리고 바다 속에 들어갔을 가능성 농후하다. 에드워드 번 존스(Edward Burne Jones)의 그림 '바다의 심연(The depths of the sea)'과 비슷한 느낌으로 말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인어 아가씨의 엄한 사랑으로 인해 왕자의 인생이 망가지는 거지만, 목숨 구해준 데 대한 '감사의 인사'도 못받고 내내 가슴앓이만 하다가 혼자 희생하고 마는 오리지널 <인어 공주> 결말이 워낙에 맘에 들지 않아서인지 <세이렌(인어)> 이야기에 나오는 마녀 버전 & 나쁜 여자 버전 '인어'에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갔다. 요즘엔 역시 '나쁜 남자, 나쁜 여자' 스토리가 대세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