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앞에서
'베아트리체 첸치' 초상화에 얽힌 안타까운 사연
타라
2013. 6. 11. 19:17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의 유명한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 하고도 비슷한 대목이 꽤 많은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화(Portrait of Beatrice Cenci)'는 딱히 미술에 큰 관심 없는 사람일지라도 '한 번쯤 봤음직한 그림'이다.
<베아트리체의 초상화>는 귀도 레니(Guido Reni)의 그림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은 바로크 시대의 여류 화가 엘리자베타 시라니(Elisabetta Sirani)가 모작해서 그렸다고 한다.('엘리자베타 시라니'는 '귀도 레니'의 조수였던 자기 아버지로 인해, 나중에 그의 그림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들이 화폭에 담은 '베아트리체'는 16세기 이탈리아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처형 당한 슬픈 사연의 여성이다.(단테의 작품 <신곡>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와는 다른 인물임)
베아트리체 첸치는 1577년, 이탈리아 귀족인 프란체스코 첸치의 첫째 부인에게서 태어났다. 그녀는 굉장한 미녀로 자라났는데, 15세 무렵 그의 방탕한 아버지로부터 겁탈을 당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그 '짐승 아버지 프란체스코'는 딸인 베아트리체를 지방에 있는 한 성에 가두고, 꽤 오랫동안 그녀에게 성적인 폭력과 가학 행위를 저질렀다. 그는 자기 아들들에게도 폭행을 일삼던 '폭력적인 아빠'였다.
베아트리체를 가엽게 여긴 그녀의 계모와 친오빠는 행정 기관에 아버지 프란체스코의 상습적인 성폭행을 신고했지만, 당시의 그는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귀족이었기에 처벌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성에서 탈출한 베아트리체 첸치(Beatrice Cenci)는 새엄마와 오빠, 친한 하인의 도움으로, 친딸을 성폭행한 그 막장 '사이코패스 아버지'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된다. 1598년의 어느 날, 그들은 프란체스코를 죽인 다음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실족사로 위장했다.
하지만 교황 휘하의 경찰들이 집요하게 추적한 끝에 범죄는 곧 발각됐으며, 그들 모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한 때, 이 비슷하게 '의붓 아버지로부터 오랫동안 성폭행 당한 여성이 남자 친구와 함께 그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비난' 아닌 '동정'의 여론이 일었던 걸로 알고 있다. 오히려 '딸을 성폭행한 막장 아버지 잘 죽었다'는 의견이 많았던...
요즘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살인'은 나쁜 거지만, 한 어린 영혼의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 간 그런 '짐승만도 못한 인간=딸을 성폭행한 자'는 살아갈 가치가 없으므로 이래 죽든(사형 당함) 저래 죽든(살해 복수 당함) 어쨌든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여기는 게 인지상정이기에 말이다.
나름 원인 있는 살인이었기에 '정당방위'가 어느 정도 인정될 법도 하고, 실제로 당시 행정 처리를 하던 공무원들이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음에도 '첸치가의 재산이 탐났던 교황 클레멘트 8세'는 귀족인 프란체스코의 남은 가족들을 없애기 위해 그들 모두에게 중형을 내렸다. 살인의 이유를 알게 된 로마 시민들은 그 판결에 항의했지만, 클레멘트 8세(Pope Clement VIII)는 끝끝내 그들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첸치 가문의 재산을 가로채게 된다.
1599년 9월.. 베아트리체 첸치는 결국 참수당하게 되었는데, 그 날 이탈리아 내에서 '미인'으로 소문난 그녀의 처형 장면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화가 귀도 레니(Guido Reni)는 처형 직전에 그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고, 그의 문하생이 된 엘리자베타 시라니(Elisabetta Sirani)가 나중에 그 그림을 따라 그린 것이 오늘날 많이 알려진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화'이다.
그 일을 알고 있는 로마 사람들은 억울하고 슬픈 사연으로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된 '베아트리체'를 권위적이고 모순된 귀족 계급과 권력자들에게 대항하는 '저항 정신'의 상징처럼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
<베아트리체의 초상화>는 귀도 레니(Guido Reni)의 그림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은 바로크 시대의 여류 화가 엘리자베타 시라니(Elisabetta Sirani)가 모작해서 그렸다고 한다.('엘리자베타 시라니'는 '귀도 레니'의 조수였던 자기 아버지로 인해, 나중에 그의 그림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화가 귀도 레니(Guido Reni)
그들이 화폭에 담은 '베아트리체'는 16세기 이탈리아에 살았던 실존 인물로, 23세의 꽃다운 나이에 처형 당한 슬픈 사연의 여성이다.(단테의 작품 <신곡>에 등장하는 '베아트리체'와는 다른 인물임)
베아트리체 첸치는 1577년, 이탈리아 귀족인 프란체스코 첸치의 첫째 부인에게서 태어났다. 그녀는 굉장한 미녀로 자라났는데, 15세 무렵 그의 방탕한 아버지로부터 겁탈을 당하는 불행을 겪게 된다. 그 '짐승 아버지 프란체스코'는 딸인 베아트리체를 지방에 있는 한 성에 가두고, 꽤 오랫동안 그녀에게 성적인 폭력과 가학 행위를 저질렀다. 그는 자기 아들들에게도 폭행을 일삼던 '폭력적인 아빠'였다.
베아트리체를 가엽게 여긴 그녀의 계모와 친오빠는 행정 기관에 아버지 프란체스코의 상습적인 성폭행을 신고했지만, 당시의 그는 교황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귀족이었기에 처벌되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성에서 탈출한 베아트리체 첸치(Beatrice Cenci)는 새엄마와 오빠, 친한 하인의 도움으로, 친딸을 성폭행한 그 막장 '사이코패스 아버지'를 죽이기로 결심하게 된다. 1598년의 어느 날, 그들은 프란체스코를 죽인 다음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실족사로 위장했다.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화(Portrait of Beatrice Cenci)
하지만 교황 휘하의 경찰들이 집요하게 추적한 끝에 범죄는 곧 발각됐으며, 그들 모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한 때, 이 비슷하게 '의붓 아버지로부터 오랫동안 성폭행 당한 여성이 남자 친구와 함께 그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었다. 당시, 그녀에 대한 '비난' 아닌 '동정'의 여론이 일었던 걸로 알고 있다. 오히려 '딸을 성폭행한 막장 아버지 잘 죽었다'는 의견이 많았던...
요즘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살인'은 나쁜 거지만, 한 어린 영혼의 인생을 파탄으로 몰고 간 그런 '짐승만도 못한 인간=딸을 성폭행한 자'는 살아갈 가치가 없으므로 이래 죽든(사형 당함) 저래 죽든(살해 복수 당함) 어쨌든 '죽어 마땅한 사람'으로 여기는 게 인지상정이기에 말이다.
나름 원인 있는 살인이었기에 '정당방위'가 어느 정도 인정될 법도 하고, 실제로 당시 행정 처리를 하던 공무원들이 정당방위라고 주장했음에도 '첸치가의 재산이 탐났던 교황 클레멘트 8세'는 귀족인 프란체스코의 남은 가족들을 없애기 위해 그들 모두에게 중형을 내렸다. 살인의 이유를 알게 된 로마 시민들은 그 판결에 항의했지만, 클레멘트 8세(Pope Clement VIII)는 끝끝내 그들 모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첸치 가문의 재산을 가로채게 된다.
화가 엘리자베타 시라니(Elisabetta Sirani)
1599년 9월.. 베아트리체 첸치는 결국 참수당하게 되었는데, 그 날 이탈리아 내에서 '미인'으로 소문난 그녀의 처형 장면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화가 귀도 레니(Guido Reni)는 처형 직전에 그녀의 모습을 화폭에 담았고, 그의 문하생이 된 엘리자베타 시라니(Elisabetta Sirani)가 나중에 그 그림을 따라 그린 것이 오늘날 많이 알려진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화'이다.
그 일을 알고 있는 로마 사람들은 억울하고 슬픈 사연으로 결국 죽음을 당하게 된 '베아트리체'를 권위적이고 모순된 귀족 계급과 권력자들에게 대항하는 '저항 정신'의 상징처럼 여기게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