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비운의 선각자, 한국 최초 '여성 서양 화가' 나혜석

타라 2010. 11. 1. 23:39
1896년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서울 진명 여학교를 졸업한 뒤, 18세 때 동경의 여자 미술 학교에서 유학하였다. 유학 시절.. 학업을 그만 두고 시집을 가라는 아버지의 요구가 있었지만, 그녀는 잠시 학업을 중단한 뒤 1년 간 스스로 학비를 벌어서 결국 '화가로서의 인생'에 발판이 되어 준 '미술 학교 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되었다.


나혜석(1896~1948)

몇 년 뒤 유학 생활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그녀는 정신 여자 중/고등 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활약하였다. 1919년엔 3.1 운동에 가담하여 몇 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뛰어난 재능과 실력으로 화가로서 두각을 드러내던 나혜석은 조선 미술 전람회 1회부터 5회 때까지 꾸준히 입선한 경력이 있으며, 1921년 한국의 여성 화가로선 최초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나혜석 그림 '스페인 항구'


1927년 무렵 '유럽'을 여행할 수 있었던 나혜석(羅蕙錫)은 서구의 다양한 화풍을 접할 수 있었으며, 그것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수법의 그림을 선보이면서 조선 미술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나혜석은 '문학가'로도 활동했으며, 여성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여성의 삶에 대한 편견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던 '여성 해방 운동가'로도 활약하는 등 그녀는 근대화 되어가던 조선의 대표적인 '신여성'이었다.

나혜석은 1920년에 결혼했지만 유럽 여행 당시 그곳의 '자유 연애 사상'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남편 외의 다른 남자'와 연애에 빠져들었다가 결국 그 사실을 안 남편으로부터 이혼 당하게 되었고, 이혼 후엔 '화가'로서의 삶에 더더욱 매진하였다. 1931년엔 제 10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정원>이란 작품으로 '특선'을 차지하였고 일본의 제국 미술원 전람회에서도 입선하는 등 화가로서 잘나갔지만, 개인적인 삶에 있어선 이런 저런 불행을 겪어야 하기도 했다.

'현모양처'로서의 삶이 강요되던 그 시대에,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하면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하고 여성 해방을 외치며 자유 연애를 추구하다가 빈 손으로 쫓겨난 이혼녀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후에 연 '전람회 실패'와 '사회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던 나혜석은 화실에서 일어난 화재로 작업한 그림을 모두 잃게 되는 아픔을 겪고, 애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인해 정신 질환에 시달리거나 반신불수의 몸이 되는 등 불행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나혜석 그림 '캉캉 무희'


록 여러 분야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성이었지만, 당시의 사회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별로 일반 대중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유부녀의 자유 연애 행각'은 결국 능력 있는 그녀의 날개를 꺾어 버리고야 말았다. 어느덧 수덕사 근처에 기거하면서 '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던 나혜석은 말년에 서울로 돌아와 양로원에서 지내다가 53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에겐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 화가, 최초의 여성 일본 유학생, 최초의 이혼녀, 근대 최초의 여류 작가' 등 무척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비록 개인의 삶에 있어선 큰 굴곡이 있었지만, 한국의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대단한 화가인 것만은 틀림없다.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 화가'로 알려진 나혜석의 대표작으론 <무희(캉캉)> <선죽교> <나부> <스페인 해수욕장> 등이 있으며, '문학가'로서 <정순> <경희>와 같은 단편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