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비운의 선각자, 한국 최초 '여성 서양 화가' 나혜석
나혜석(1896~1948)
1927년 무렵 '유럽'을 여행할 수 있었던 나혜석(羅蕙錫)은 서구의 다양한 화풍을 접할 수 있었으며, 그것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수법의 그림을 선보이면서 조선 미술계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나혜석은 '문학가'로도 활동했으며, 여성들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거나 여성의 삶에 대한 편견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던 '여성 해방 운동가'로도 활약하는 등 그녀는 근대화 되어가던 조선의 대표적인 '신여성'이었다.
나혜석은 1920년에 결혼했지만 유럽 여행 당시 그곳의 '자유 연애 사상'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남편 외의 다른 남자'와 연애에 빠져들었다가 결국 그 사실을 안 남편으로부터 이혼 당하게 되었고, 이혼 후엔 '화가'로서의 삶에 더더욱 매진하였다. 1931년엔 제 10회 조선 미술 전람회에서 <정원>이란 작품으로 '특선'을 차지하였고 일본의 제국 미술원 전람회에서도 입선하는 등 화가로서 잘나갔지만, 개인적인 삶에 있어선 이런 저런 불행을 겪어야 하기도 했다.
'현모양처'로서의 삶이 강요되던 그 시대에, 자기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하면서 다양한 사회 활동을 하고 여성 해방을 외치며 자유 연애를 추구하다가 빈 손으로 쫓겨난 이혼녀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이후에 연 '전람회 실패'와 '사회의 차가운 시선' 속에서 경제적으로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던 나혜석은 화실에서 일어난 화재로 작업한 그림을 모두 잃게 되는 아픔을 겪고, 애들을 보지 못하게 된 충격으로 인해 정신 질환에 시달리거나 반신불수의 몸이 되는 등 불행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비록 여러 분야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성이었지만, 당시의 사회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별로 일반 대중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는 '유부녀의 자유 연애 행각'은 결국 능력 있는 그녀의 날개를 꺾어 버리고야 말았다. 어느덧 수덕사 근처에 기거하면서 '불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던 나혜석은 말년에 서울로 돌아와 양로원에서 지내다가 53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에겐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 화가, 최초의 여성 일본 유학생, 최초의 이혼녀, 근대 최초의 여류 작가' 등 무척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비록 개인의 삶에 있어선 큰 굴곡이 있었지만, 한국의 미술계에 큰 영향력을 끼친 대단한 화가인 것만은 틀림없다.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 화가'로 알려진 나혜석의 대표작으론 <무희(캉캉)> <선죽교> <나부> <스페인 해수욕장> 등이 있으며, '문학가'로서 <정순> <경희>와 같은 단편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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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환영받지는 못할 일이지만 그래도 조금만 뒤에 태어났다면 뭔가 좀 달라질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왠지 멋있게 느껴지는 건..저 뿐인가요?
답글 -
빠리불어 2010.11.02 01:03
외국에서 태어났다면 대성할 여인이네여 ㅡㅡ;;;
답글
안타깝습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는 말......
다 거짓이네여... ㅡㅡ;;;
11월도 행복하세여, 타라님 ^^*-
예전에.. 윤여정씨 관련 기사나 얘기들을 접한 적이 있는데요..
(지금이야, 왕성하게 활동하시지만) 조영남씨랑 이혼하고 한국에
돌아온 뒤 '이혼녀'라서 드라마 출연하기 힘들었다고 하더군요..
원래는 '주연급' 배우였음에도 말이지요~
그랬던 걸, 당시 잘 나가고 있던 김수현 작가가 기용해서 다시
'비중 있는 역'으로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었다고 하던데요...
(요즘엔 여자 연예인들 이혼이 아무 문제 안되지만) 윤여정씨가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엔, 우리 나라에서 여배우가 이혼한 걸로도
꽤 문제시 됐었나봐요...
헌데, 나혜석 화가의 경우엔 '그보다 훨씬 보수적이었던 시대'에
살았으니... 이혼한 걸로 '사회적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나
보더군요~(더더군다나, 다른 남자 만난 사실 들켜서 시댁에서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어쨌든 '재능 있는 인재'였는데, 말년까지 그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없게 되어서 무척 안타깝습니다.. 그 때와 다른 시대,
다른 사회에 태어났다면 그녀의 인생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그래두 후대의 사람들이 많이 기억해 주고, 그 재능과 문화적 업적을
인정해 주니, 먼 곳에서라도 부디 편안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빠리불어님두 행복한 하루하루 보내시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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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에 관한 평가는 극과 극이라서
답글
조금은 마음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선각자라는 것에는 츨림이 없는 듯 합니다
잘보고 갑니다 -
이 분을 항상 따라다니는 말이 '친일파' 논란이죠.
답글
아마 이혼한 남편 때문에 그런 부분이 강조되지 않나 싶습니다..
남긴 작품 그리고 업적과 개인적인 부분은 확실히 분리해서 평가하는게 어떨까 싶은 인물이에요...
재능이 아까운, 시대가 망가뜨린 인물이기도 하구요.. -
Lipp 2010.11.02 18:54
시대를 앞서간 여성들은 거의 모두 말년이 비참한거 같아요...
답글
안타까운 일이에요,, -.-
생각해보면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솔직한거 뿐 인데 말이죠..
진실과 솔직함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늘 통하는건 아니라는걸 증명하는 셈.. -
Rokas 2010.12.25 16:44
나혜석 女士... 정말 여권신장의 선구자이시지요...
답글
나혜석 女士 씹어대는 ㅂㅕㅇㅅㅣㄴㅇㄱㅠ깝새들이 더럽지!!!!!!!!!!!!!!!!!!!!!!!!!!!!!!!!!!!!!!!!!!!!! -
케프카 2010.12.30 11:51
나혜석 작품은
답글
선죽교를 제외하고는 앞에 전(傳)을 붙여야 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개인전을 한 작가'란 타이틀도 붙는, 그만큼 작품양도 많았지만
정조유린 소송 스캔들 이후 나혜석의 이미지가 급격히 나빠지며
그런 부정한 여자가 그린 작품을 집에 놔둘수 없다고해 사라진 그림이
굉장히 많습니다. 타라님이 쓰신 본문에 있는 무희 그림처럼 스타일이 전혀다른
그림이 나햬석 작품이다란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죠. 싸인 하나 때문에 말이죠.
나부란 작품은 이미 원본이 나왔고, 그 외에도 미술사적으로는 나혜석의 작품이
라 불리는 작품이 대부분 가짜로 알려졌습니다.
배운 사람으로서, 페미니스트로서 그녀는 그 시대를 충실히 산 신여성이지만
시대를 뛰어넘으려는 욕심은 여자로서, 엄마로서 철저히 실패의 결과를 가져오죠.
(사실 결혼이 맞지 않은거죠. 첫사랑도 유부남이었으니)
아직까지 사망신고도 안된걸로 알고 있어요.
교수님 때문에 레포트를 철저히 쓸 수 밖에 없던 옛생각이나 적어보고 갑니다 ^^-
그런 사실이 있었군요~ 어쩐지.. 어떤 그림들 보면
화풍이 많이 다르긴 하더라구요~
그런데.. 이미지가 나빠졌으면 원래 그녀가 그린 그림들도
아닌 걸로 숨겨질 법 한데, 안 그린 그림도 그녀의 그림처럼
포장되었다니 좀 흥미로운 사실이네요..?
시대를 반 발짝만 앞서가도 좋을텐데, 여러 발짝씩 성큼성큼
앞서가는 사람들은 묘하게 부작용이 생기더라구요.. 영혼이
자유로워서 그런 거겠지만, 당대의 사회적 틀에도 어느 정도
요령껏 맞춰가며 사는 지혜가 필요하단 생각이 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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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2011.10.19 17:55
나혜석은 착한심성의 소유자는 아니었으나 참으로 딱한 희생자죠! 단지 다른남자와 연애질을 했다는이유로 이혼당했던건 둘째치고 대신 아이들을 만나지도 못했잖아요?
답글 -
hellokitty 2011.10.20 10:42
저는 왠지 나혜석이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예전에 소문난 칠공주나 애정의 조건 같은 드라마를 보면 남편은 다른여자랑 바람피는 걸 들키면 여자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하거나 아니면 다시는 안그럴 것이다라고 마음먹고 덮어버리려 하는데 남자들은 자기여자가 바람피거나 다른 남자랑 눈만 마주치기라도하면 바로 의심을 하거나 이혼을 해서 전여자 내쫓고 자기랑 바람핀 상대랑 재혼하고 그러더라구요 만약 이시대에 나혜석이 여자가 아닌 남자였으면 인생이 저렇게 까지 되었을까 싶네요.
답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