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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정파 왕, 세기의 완전한 사랑 : 공민왕과 노국공주

타라 2012. 5. 26. 01:53

고려 31대 왕이었던 공민왕(1330~1374)은 14C 후반 '원/명 교체기' 때 원에게 잃은 영토를 되찾고, 권문세족을 숙청하고, '반원 자주 정책'을 펼쳤던 개혁 군주이다. 원(元)의 간섭을 받던 시기에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원나라에 볼모로 가 오랫동안 그곳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당시의 고려 왕실 모계 쪽은 (속국인 고려에 대한 간섭을 목적으로) 원나라 여성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공민왕의 경우엔 생모가 고려인이어서 왕위 계승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기에 원나라의 노국 공주와 정략 결혼했고(1349년) 그 후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허나 그 시작은 '정략 결혼'이었지만, 공민왕노국공주는 한평생 서로를 깊이 사랑한 '금슬 좋은 부부'였다. 노국공주(魯國公主)는 준수한 외모에, 성품도 곱고 현명하여 공민왕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정치적으로 고려는 원(몽고)복속된 관계였었고, 그로 인해 고려에 시집 온 원나라 황실녀들은 오만하거나 남편을 자기 멋대로 좌지우지할려는 경향이 강했다. 심지어는, 그 시기의 고려의 왕들 중 원나라 출신 왕후(부인)에게 맞고 사는 왕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나라의 황족 위왕(魏王)의 딸로서 고려에 시집 온 노국 공주는 고려를 하나의 주체적인 나라로 존중해 주었고, 공민왕이 추진한 일이 친원 세력을 제거하고, 몽고풍을 폐지하는 등 자기 나라를 배척하는 '반원(反元) 책'이었음에도 그가 하는 개혁 정책을 지지해 주었다.

고려 시대 대표적 화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공민왕은 뛰어난 문장가에, 음악을 사랑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등 예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왕이었다. 특히, 공민왕이 남긴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는 무척 유명한 그림이다.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진(魯國大長公主眞)'도 남겼는데, 그 노국공주 초상화는 조선 연산군 때 이후로 소실되었다고 한다.

(현재로선 노국 공주의 초상화가 남아 있지 않으며, 가끔 가다 '노국 공주' 그림이라 검색되는 건 진짜 그녀의 모습이 아닌 걸로 알고 있다.)

 

드라마 <신돈> 공민왕(정보석)-노국공주(서지혜)

그렇게 예술가적인 감수성이 풍부했지만, 타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공민왕에게 노국공주가 말 타는 법을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한 때 노국공주가 칼로 위협하는 자객들로부터 공민왕을 지켜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데.. 남자인 공민왕에겐 은근히 '섬세하고 감성적인 면모'가 있고, 몽골 출신의 노국 공주는 '대차고 용맹한 기질'을 지닌 여성이 아니었나 싶다.

비록 정략 결혼으로 맺어졌지만, 진짜 사랑하게 된 그들은 서로를 위하는 다정한 부부였다. 노국 공주는 나라 공주였음에도 공민왕에게 시집 온 이후론 자신을 고려인이라 여기며 그의 '반원 정책'을 지지해 주었고, 공민왕은 '반원주의자'였음에도 원나라 출신의 노국 공주를 진심으로 아껴 주었다.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고, 고려의 자주에 힘썼던 진보적 의식의 왕 공민왕(恭愍王) 시대는 나름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 부부에겐 한 가지 고민이 있었으니, 결혼한 지 오래도록 노국공주(魯國公主)아기를 갖지 못했다.

 

결혼 초에 한 번 유산하고, 그 후 16년이 지나서야 다시 임신하게 된 노국공주는 중년의 나이에 애를 낳다가 난산(難産)으로 결국 아이와 함께 사망하게 된다.(1365년) 그로 인해 공민왕은 심히 슬퍼하였고, 3년 동안 육식을 금하면서 매일 매일 노국공주의 무덤에 가서 제를 올렸다.

MBC 드라마 <신돈>의 공민왕과 노국공주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이후론 정사(政事)를 멀리 하면서, 스스로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 벽에 걸어놓고 매일매일 쳐다보며 그리워했다고 한다.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보탑실리공주(寶塔實里公主)'가 죽은 지 몇 년이 지나도록 그녀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 초상화를 앞에 두고서 식사를 했고, 그녀가 살아있는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네기도 했다.

공민왕의 모친은 다른 왕비나 후궁으로 마음을 잡으라 했지만 그는 '다른 여자가 노국 공주를 대신할 수는 없다'며 울먹였고, 그 후 후궁을 맞긴 했으나 공민왕은 후궁에게 별로 마음을 주지 않았다.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공민왕은 노국 공주가 죽은 후 여자처럼 화장을 하는 등 '여장'을 하였다 전해진다. 그리곤 마음을 잡지 못한 채 방탕한 생활에 빠져들었는데, 그것에 관하여 '공민왕이 부인을 잃은 슬픔이 너무 큰 나머지 정신병을 얻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1372년 공민왕은 잘생긴 청년들로 구성된 자제위(子弟衛)를 설치하여 자기 시중을 들게 했다. 이 자제위는 왕의 친위대이자, 요동 정벌을 목적으로 한 군사 부대이기도 했다. 후대인 조선 시대에(고려 왕조를 뒤집어 엎고 조선을 건국한 입장에서) 쓰여진 사료에선 과장된 내용을 통해 공민왕을 약간 폄하한 감도 있는데, 실제의 공민왕은 어쩐지 '가정적이기도 하면서 정치적으로도 꽤 좋은 왕'이었을 것 같다.

노국공주 이외의 다른 후궁들에겐 마음을 주지 않았던 공민왕은 자제위 미소년들과 자신의 후궁을 관계하게 해서 이를 몰래 엿보는 관음증적인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는 얘기가 있다.(주진모, 조인성 주연의 영화 <쌍화점> 이야기가 공민왕의 일화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인데, 개인적으로 영화 <쌍화점>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랑했던 노국공주가 죽은 후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모든 의욕을 잃고 정신줄을 놓은 채 허무한 나날을 보내던 공민왕은 자제위 출신의 홍륜과 내시 최만생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한다.(자제위 출신의 홍륜이 공민왕 후궁인 익비와 관계해서 그녀가 임신했고, 왕이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홍륜을 처형하려 하자 그걸 눈치 챈 홍륜이 선수 쳐서 만생과 함께 공민왕 처소에 침입해 을 칼로 도륙함)

 

공민왕의 암살에 관해선 갖가지 카더라설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당시의 정치적 세력에 의해 공민왕이 방탕한 생활을 한 것처럼 날조된 사실이 강화되고, 그의 후궁인 익비(益妃)와 홍륜(洪倫)이 그 정치적 계략에 이용되어 덤터기 썼다'는 견해 쪽에 마음이 혹한다.

죽어서까지 노국공주와 함께 하고자 했던 공민왕은 고려 왕조의 다른 왕들과는 다르게 그녀와 나란히 묻혔다. 공민왕은 노국공주가 죽은 뒤 '만일 자신이 죽으면, 죽어서도 서로의 영혼이 통하는 을 만들어 노국 공주와 자신이 계속해서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고 유언했고, 그에 따라 공민왕의 무덤 내부엔 노국 공주의 무덤과 연결되게 구멍을 뚫어 놓았다고 한다.(손이 맞닿을 만한 네모난 구멍)

노국공주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그 시기 고려의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보통 옛날 왕들이나 정치가들의 행적을 보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사랑도 냉정하게 이용하는 이들이 많던데.. 사랑하는 부인 노국공주가 죽고 나자 '꿈'도 '원대한 계획'도 다 부질없다 여기며 정신줄을 놓은 걸 보면, 공민왕은 세상에 다시 없을 '순정파 왕'이 아니었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