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아름다운 나라를 꿈꾼 독립 운동가 : 백범 김구

타라 2010. 8. 15. 19:52
김구(金九) : 한국의 독립 운동가 & 정치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창암(昌岩)이었으나, 18세 때 창수(昌洙)로 이름을 바꾸고 그 뒤 구(九)로 개명했다. 호는 백범(白凡)이다. 상하이로 망명한 뒤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여했으며 한인 애국단, 신민회 등에서 활동했다.

백범 김구(1876~1949)


김구 선생은 '가장 미천한 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같은 애국심을 가진 자가 되게 하려는 뜻'에서 백정(白丁)의 '()'자와 범부(凡夫)에서의 '()'자를 딴 백범(白凡)이란 호를 지었다..

-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의 일생 -

1884년 : 9세 때 '한글'과 '한문'을 익힘
1887년 : 12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함

1893년 : 18세 때 동학(東學)에 입도하여 포교에 힘씀
1894년 : 해주에서 동학 혁명(동학 농민 운동)을 지휘


1896년 :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군 살해 후 사형 선고. 
고종의 특사로 감형됨

1989년 : 탈옥하여 전국을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서 승려로 지냄. 법명은 원종(圓宗)
1900년 : 김두래라는 가명으로 강화도에 은거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침

1905년 : 을사조약 철회를 주장하는 내용을 상소함
1908년 : 안창호 등과 신민회를 조직. 안악에 양산 학교 설립

1909년 : 황해도에서 신교육 운동을 펼치며, 배일 운동을 전개. 재령 보강 학교 교장으로 교육 사업에 몰두함

1910년 : 신민회 회원들과 만주 무관 학교 설립을 결의

1911년 : 105인 사건으로 체포된 후 17년형 선고 받음
1915년 : 감옥에서 중노동을 하다, 복역 중 감형되고 가출옥으로 석방. 이후 소학교 개설.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침


1919년 : 3.1 운동 후,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초대 경무 국장을 지냄
1926년 : 임시 정부 국무령에 취임

1928년 : 자서전 '백범일지(白凡逸志)' 집필
1930년 : 한국 독립당 조직

1931년 : 한인 애국단을 조직한 뒤 독립 투사 양성
1932년 :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휘함
1935년 : 이동녕, 이시영 등과 한국 국민당 조직


1940년 :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주석으로 선출. 한국 광복군 조직
1945년 : 신탁 통치 반대 운동(반탁 운동) 전개

1947년 : '나의 소원' 발표. 비상 국민 회의 부주석
1948년 :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 제창

1949년 : 경교장에서 안두희(安斗熙)에게 피습 당하여 사망함
1949년 : '국민장'으로 효창 공원에 안장됨

1962년 : (사후에) '건국 훈장 대한 민국장'이 추서되었음


백범 김구 어록 ]

- 얼굴이 잘생긴 것은 이 건강한 것만 못하고, 몸이 건강한 것은 마음이 바른 것만 못하다.

-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께서 물으신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오직 대한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면 나는 또 "우리 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세 번째 물으셔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 "내 소원은 우리 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기를. 오늘 내가 걸어간 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富)력이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强)력이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큰 행복을 가져다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