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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마지막 왕조, 항일 정신의 미남 왕자 : 이우

타라 2010. 6. 29. 21:57
이우 : 고종 황제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차남으로 1912년에 태어났다. 조선의 마지막 왕인 순종의 조카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관심을 받게 된 조선 마지막 황가의 '이우 왕자'는 세계 왕실의 왕자와 공주들 중 상위권에 드는 미모를 지닌 '미남'이었는데, 타고난 외모 뿐 아니라 의기 또한 대단했던 사람이었다.

이우 왕자(1912~1945)


어린 시절의 이우는 흥선 대원군의 첫째 아들인 흥친왕의 아들 이준용이 후사 없이 별세하자, 고종의 명에 따라 대원군의 증손자로 입적되어 운현궁 살림을 이어받게 된다.(흥선 대원군의 첫째 아들-흥친왕/흥선 대원군의 둘째 아들-고종) 그는 황실의 여동생들로부터 '운현궁 오빠'라 불렸다 한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 '독립 운동'에 투신했던 조선 마지막 왕가의 자손들

이우의 아버지인 의친왕 이강(=고종 황제의 아들)

'이우' 왕자가 미남으로 태어난 데에는 그의 아버지인 의친왕(or 의왕)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다. 나름 미남인 의친왕 '이강'은 고종의 아들들 중 가장 총명하였으며, 조선이 일제에 강제 병합된 이후론 사재를 털어 '독립 운동'에 투신하였고 끝까지 배일 정신을 지킨 인물이다. 아버지 의친왕으로부터 총명함을 이어받음과 동시에 수려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던 이우 왕자는 원래 황가의 일원이었으나, 한일 병합 이후 황실이 왕실로 격하되자 공작으로 불리워졌다.('이우공'으로~)

고종 황제의 딸인 덕혜 옹주나 그의 형 이건(의친왕의 첫째 아들)의 경우처럼, 이우도 1922년 어쩔 수 없이 볼모 격으로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학업을 마치게 된다. 하지만 왕족으로서의 위엄과 강인한 기개가 있었던 이우 왕자는 일본에 대해선 끝까지 적대적이었다.


이우는 '일본 여성'과 결혼할 것을 요구하는 일본 측의 강요를 거부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조선인 여성'과 결혼하게 된다. 원래 이우 왕자는 독립 운동가의 딸과 약혼한 사이였지만 일본 측의 강렬한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고, 그 '타협안'으로 친일파의 손녀딸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 공부하던 이우는 1929년 '육군 사관 학교'에 들어가 군인의 길을 걷게 되는데, 그곳에서 종종 일본 급우와 마찰을 일으켜 일본 정부의 '요주의 인물'로 찍히고 그들의 경계와 감시의 대상이 된다.


대한 제국 황족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있었던 이우는 일본 내에서도 '일본말' 대신 의도적으로 '한국(조선)말'을 사용하며, 일제의 압박에 굴하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한 고위 관리는 이우 왕자에게 '호랑이 같은 조선 왕족의 핵심'이라고까지 말했다. 이우공이 일본인들에겐 대체로 냉정하게 대했지만, 조선인 동포들에겐 늘 자상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고 한다. 일본 육군 사관 학교 시절의 그는 술자리에서 당시 금지곡이었던 '황성옛터'를 자주 부르곤 하였다.

이우 왕자는 일본인들마저도 감탄할 정도로 무척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노래도 잘 부르고, 총명하고 활달한 성격과 의기 넘치는 태도 &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그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940년 육군 대학을 졸업하고 1942년 소좌로 진급한 이우공은 황족이 선봉에 서야 한다는 일본 정부의 정책에 의해 '중일 전쟁'이 한창이던 중국 산서성의 태원으로 발령 받게 된다.


이후, 정보 참모로 근무하며 중좌에까지 진급한 이우는 그곳에서 3년 간 근무하는 동안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직접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고, 일본군의 작전을 넘겨주기도 했던 그는 독립군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이우공은 육사 동기 이형석 장군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일본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몹시 부끄럽다. 우리 나라 군복을 입고 당당히 살 때까지 기다리라~"고 전하기도 하였다.

이우는 '정보 참모'로 있으면서 치밀하게 준비하여 일본의 관동군과 전투를 벌일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이를 눈치 챈 일본이 그의 보직을 '교육 참모'로 바꾸고 일본의 히로시마에 발령내 버렸다. 이우는 서울에 있는 운현궁으로 들어가 6개월 가량을 버티며 전출을 거부하고 '한국에 배속시켜 달란 청원'을 하며 히로시마행을 늦췄지만, 일본으로부터 거절 당하고 어쩔 수 없이 히로시마로 가게 된다.

그가 히로시마에 첫 출근하던 바로 그 날, 그곳에 원자 폭탄이 투하되었다. 부상을 입은 이우는 구조되어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도쿄에 있는 전문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의 상태는 점점 좋아지고 있었으나, 그날 밤 갑작스럽게 상태가 악화되어 사망하기에 이른다.(여기엔, 이우 왕자를 눈엣 가시처럼 여긴 일본 측이 그의 부상을 틈 타 독살하였다는 설도 있다.)

적의 나라 감시자도 반한 탁월한 성품의 얼짱 왕자 : 5년 차이로 태어난 한류 스타 원조들?

이우 왕자에게는 일본 정부가 붙여준 '감시원'이자 군인인 요시나리가 늘 따라다녔다. 원래는 일본 정부에 '이우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하면서 그를 감시하던 일을 했던 요시나리는 결국 이우의 인격과 성품에 매료되어 그를 존경하게 되고, 이우공의 심복이 된다.


본에서 이우의 임종을 지켰던 요시나리는 이후 그의 죽음은 자신의 책임이라며, 유서를 쓰고 할복 자살하였다고 한다. 일본 정부에서 파견한 '일본인 감시자'가 적의 나라 출신인 이우공이 죽자 따라 죽기까지 하다니, 얼마나 멋있었으면~ 일본인 요시나리는 조선 마지막 왕조의 왕자였던 이우의 열혈 팬이었던 듯하다..
('총명함과 강인한 기개를 지녔던 얼짱 이우 왕자'는 '일본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또 다른 얼짱 시인 윤동주'와 더불어, 한류 스타의 원조?)

이우의 시신은 귀국 후 경기도 마석에 모셔졌다. 마침 그의 장례식날은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한 1945년 8월 15일이었다. 그 때 이우 왕자의 나이는 34세.. 그는 죽어서야 조국의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우 왕자가 하루만 늦게 히로시마에 도착했다면, 한국의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이우 왕자는 "독립된 장래의 우리 나라는 '제국'이 아니라 '민국'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는데, 민주주의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당시 그를 간호했던 한 일본인 간호사는 "그 분은 매우 큰 분이셨다. 만일 이우 왕자가 살아 계셨다면, 대한 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라며 이우에 대한 회상을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