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vien Leigh(1913~1967) |
본명은 비비안 메리 하틀리(Vivian Mary Hartley)- 그녀의 어머니는 아일랜드계 영국인이며, 런던 증권가의 부호였던 아버지는 프랑스계 영국인이다.
5세 때 고국인 영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거기에서 학업을 마치고, 파리와 로마 등지를 오가며 연기를 배웠다. 학창 시절 인기가 좋았던 비비안의 꿈은 무대 배우가 되는 것이었는데, 연극을 즐겨 보던 그녀의 아버지는 비비안 리가 런던 왕립 연극 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해 주었다.
1932년 허버트 리 홀만(Herbert Leigh Holman)이라는 변호사와 사랑에 빠진 비비안 리는 19세의 어린 나이로 결혼하게 되며, 다음 해 딸 '수잔'을 낳는다.
허나, 그녀의 삶에서 영국이 낳은 최고의 미남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를 떼어놓을 수는 없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비비안 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가장 뜨겁게 사랑한 남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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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 활동 이전 '연극' 무대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던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는 귀족적인 품격을 지닌 고전적인 백인계 미남이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가장 잘 해석하여 연출하고 연기한 배우로 손꼽히는 로렌스 올리비에는 1934년 런던의 한 극장에서 '햄릿'을 연기하고 있었는데, 당시 여러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던 신인 배우 비비안 리는 로렌스의 그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 버린다.
하지만 이들은 각자 가정이 있는 유부남-유부녀였다. 로렌스 올리비에 역시, 일찌감치 질 에드몬드라는 여배우와 결혼하여 한 아이를 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렌스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 비비안은 용기를 내어 의도적으로 그에게 접근하고, 처음부터 그녀에게 호감을 느꼈던 로렌스 올리비에도 이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비비안 리에게 매혹 당한다. 그 후 같은 영화의 주연 배우로 출연한 이들은 더더욱 가까워져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 되며, 비비안 리는 남편과 딸을 버린 채 로렌스 올리비에와 동거 생활을 시작한다.
<폭풍의 언덕> 주연으로 캐스팅 된 로렌스 올리비에가 헐리우드로 건너가자, 비비안 리도 그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녀는 이곳에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스칼렛' 역으로 캐스팅 됨으로써 인생 역전의 기회를 맞게 된다. 실은 비비안 리가 이 역을 따내기 위해 몇 개월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를 많이 했다고 한다.
비비안 리를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어 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결국 지난 상대와 각각 이혼하게 된 비비안 리와 로렌스 올리비에는 1940년 두 번째 결혼식을 올린 뒤 한동안은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그 행복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참 묘하게도, 자기만의 '사랑'을 위해 '배우자와 자식'을 버린 이들의 말로는 대체로 좋지 않은 경향이 있는 듯하다..)
허약 체질이었던 비비안 리는 1945년 영화 촬영 중 폐결핵으로 쓰러지고, 로렌스의 아이마저 유산하게 된다. 로렌스 올리비에는 한동안 쉬면서 그녀를 극진하게 간호하고 비비안 리는 병을 회복하지만,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러 영화에 출연한 뒤 무리한 촬영과 줄담배로 인해 그녀의 폐결핵은 재발된다.
여배우로서 완벽한 미모와 연기적인 재능을 지닌 비비안 리(Vivien Leigh)는 걷잡을 수 없이 복잡한 성향의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신체적 건강 이상과 더불어, 정서적으로도 불안정하고 격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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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리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정신 분열증에 걸리는 여주인공' 역을 맡아 재기에 성공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이어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그 영화에서의 모습처럼 실제의 그녀도 정신적으로 점점 피폐해져 갔다. 결핵과 조울증에 걸린 비비안 리는 갈수록 감정의 기복이 심해지면서 신경질적으로 변해갔고, 심할 때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큰 소리로 욕을 하기도 하였다.
아내 비비안 리의 잦은 병치레와 심각한 히스테리로 인해 남편인 로렌스 올리비에도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로렌스를 너무 사랑했던 비비안은 그에게 다른 여자가 생길까 늘 전전긍긍하면서 더더욱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갔고, 그녀에게 서서히 지쳐가면서 힘들어 하던 로렌스 올리비에는 비비안의 예감대로 30세 연하의 여배우 조안 플로라이트와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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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생활을 이어가던 로렌스는 악몽 같은 비비안과의 결혼에서 벗어나기를 원했고, 비비안 리도 결국 로렌스 올리비에와의 이혼을 수락한다. 1959년 그녀와 이혼한 로렌스 올리비에는 1961년 조안 플로라이트와 재혼을 하게 된다. 비비안 리 또한, 연하의 배우 존 메리베일(John Merivale)과 잠깐 동안의 로맨스를 즐기기도 하였다. 하지만 가장 뜨겁게 사랑했던 로렌스 올리비에와 헤어진 비비안 리는 조울증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다시 재발한 폐결핵과 정신 분열증을 앓다가 1967년 외롭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녀는 죽기 얼마 전까지도 '무덤에 갈 때까지 그(로렌스 올리비에)를 사랑할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한 때, 자신이 배우로서의 자질을 갖추는 데 큰 영향을 끼친 '로렌스 올리비에'를 비비안 리는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에 이뤄진 비비안 리의 추도식에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추도식의 집행 위원장으로 참석하였고, 그녀의 첫번 째 남편인 허버트 리 홀만과 마지막 연인이었던 존 메리베일도 참석했다.
비비안 리의 두 번째 남편이었던 로렌스 올리비에는 그가 죽기까지 함께 산 마지막 부인 조안에게도 자상하고 헌신적인 남편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증언에 따르면, 80세를 넘긴 로렌스 올리비에가 어느 날 집에서 비비안 리의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건 진짜 사랑이었다~"고 얘기하면서...
비비안 리와 로렌스 올리비에 : 영화 <무적 함대/영광의 결전> |
세기의 선남선녀 커플이었던 로렌스 올리비에(Laurence Olivier)와 비비안 리(Vivien Leigh), 마지막까지 둘 다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긴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남편과 딸을 버리고 새 사랑을 찾아간 비비안 리'가 결국 그 사람과 헤어진 뒤 쓸쓸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걸 보면, '원래의 배우자를 버리고 택한 그런 류의 사랑'의 말로가 좋기란 힘든가 보다.
비비안 리가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존 메리베일이 유품을 정리하면서 '비비안 리의 전성기 때 초상화'를 그녀의 외동딸인 수잔 홀만(비비안 리와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인 허버트 리 홀만 사이에서 난 딸)에게 전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비비안 리의 유일한 자식이었던 수잔 홀만은 "어머니는 새로운 사랑과 영화만을 위해 살았을 뿐, 딸인 나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 초상화를 간직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비비안 리의 그 초상화를 고물상에 팔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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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슬픈 일화이지만, 어떤 면에서 보면 '자업자득'적인 성격도 강한 것 같다. 젊은 시절의 비비안 리가 '아이는 성가신 존재'라는 말을 하며, 한 남자의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비비안 리의 딸 수잔은 부모(엄마)가 자신을 버렸어도 무조건적으로 다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평양 오지랖의 소유자 & 쉬운 자식이 아니라, 엄마 닮아서 무척 도도하고 강한 자존심의 소유자인 듯...
[ 비비안 리(Vivien Leigh) 출연 영화 ] 1935년 : 만사 위를 향해 1935년 : 마을의 명사 1935년 : 신사 협정 1935년 : 위를 향해 웃어라 1937년 : 무적 함대/영광의 결전 1937년 : 간첩 1937년 : 찻잔 속의 폭풍 1938년 : 옥스포드의 양키 1938년 : 런던의 보도 1938년 : 21일을 향해 1939년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40년 : 애수 1941년 : 해밀턴 부인 1946년 :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1948년 : 안나 카레리나 1951년 :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55년 : 사랑은 깊은 바다처럼 1961년 : 로마의 애수 1965년 : 바보들의 배 |
30년 간의 연기 생활을 통해 비비안 리(Vivien Leigh)는 총 41편의 연극 작품과 19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