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엘 쿤체 & 실베스터 르베이 콤비의 <엘리자베트(Elisabeth)> 오스트리아 원 버전에 대비한 다카라즈카 버전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루돌프가 죽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좀 더 개연성 있게 보강되었다'는 점과 '죽음 캐릭터의 비중이 대폭 늘어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 외에도 사소한 변경 사항이 있으며, 다카라즈카 <엘리자베트>는 전반적으로 극이 좀 더 깔끔하고 일관성 있게 정리된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 버전의 단점이라면 '쿤체씨의 오리지널 독일어 가사에 비해 내용이 약간 가벼워진 듯한, 다소 유치찬란하고 손발 오글거리는 느낌의 일본어 번안 가사' 정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식으로 출시된 DVD판 대비, 2005년 빈 공연 실황을 담은 오스트리아(독일어 공연) <엘리자베트>에선 '남자 주인공'인 죽음(Tod/독일어로 '토트'라고 발음함)의 비중이 다소 애매모호하고 '조연'으로 설정된 프란츠 요제프 황제나 화자 루케니의 비중이 의외로 컸던 것에 반해, 다카라즈카(일본어 공연) <엘리자베트>에선 절대적으로 죽음(일본어로 '토토'라고 발음함) 캐릭터의 비중이 크다. 

또한, 이 다카라즈카(타카라즈카) <엘리자베트(에리자베토)>에선 각종 공연 홍보 포스터나 CD/DVD 표지 사진 등에서도 '남자 주인공인 죽음' 캐릭터가 중심 인물로서 가장 크게 나오며 '오리지널 주인공이었던 엘리자베트'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더불어 구석에 조용히 찌그러져 있는 분위기이다. ;; 이름이 소개되는 순서도 항상 '죽음' 역이 첫 번째이다. 이것은 '남역이 메인 주인공(제 1 주인공)이 되는 다카라즈카' 고유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같은 일본판이지만, 다카라즈카 가극단 공연이 아닌 일본의 일반 뮤지컬(토호 극단?) 버전 <엘리자베트>에선 오스트리아 원 버전과 마찬가지로 여주인공인 '엘리자베트'가 메인(타이틀 롤)이며, 포스터나 CD 표지 등에서도 '엘리자베트'가 먼저이거나 '죽음'과 거의 대등한 분위기로 나오는 듯하다. 다른 나라 버전도 마찬가지일텐데, 이 작품에 한해서 가장 특이한 것은 역시나 '여배우가 남자 캐릭터까지 다 소화하며 남역이 중심이 되기에 죽음을 제 1 주인공으로 설정한 다카라즈카 버전'이 아닐까 한다.

나른한 분위기의 토토 사마~(사랑에 빠지기 전)


'오스트리아 원 버전에선 제 2 주인공이었던 죽음→제 1 주인공으로 등극한 <엘리자베트> 다카라즈카 버전'에선 이 죽음(황천의 제왕 토토 사마) 캐릭터가 '남자 주인공치곤 너무 드문드문 나왔던 독일어권 오리지널 버전' 때와는 다르게, 여기 저기 안 끼는 데가 없다. 일단.. 오스트리아 원판에선 죽음(토트)이 사경을 헤매던 엘리자베트(씨씨)를 처음 만났을 때 그냥 침대에 그녀를 데려다만 주고 '노래'는 엘리자베트 혼자 부르지만, 일본 다카라즈카판에선 이 장면에서 '죽음 캐릭터가 부르는 노래이자 이 판본의 메인 테마송'에 해당하는 곡을 새로이 만들어서 부르게 한다. 이름하여 '사랑과 죽음의 론도(愛と 死の 輪舞)'~ 다카라즈카판 <엘리자베트>의 부제목(서브 타이틀)이기도 하다.

<엘리자베트> 다카라즈카(타카라즈카) 버전의 메인 테마송이자 죽음(토토) 솔로곡인 '愛と 死の 輪舞(사랑과 죽음의 론도)'는 오스트리아(독일어 버전) 원판에는 없고 일본판에서 처음 들어간 노래인데, 은근히 중독성이 강하다. 일본판에 이어 헝가리판 <엘리자베트>에서도 이 멜로디의 곡을 사용하고 있는데, 헝가리판 곡명이나 가사 내용은 일판의 '愛と 死の 輪舞'와는 좀 다르지 않을까 한다.

일단 양 판본에서 부여한 '죽음'이란 등장 인물의 컨셉이나 특징 자체가 다르다. 헝가리판 '죽음'은 감정을 많이 배제한 죽음, 자신이 가진 위력으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듯한 '무미건조하고 음산하고 무서운 죽음'의 느낌이 강하다. 그에 반해, 서브 타이틀부터가 <사랑과 죽음의 론도>인 다카라즈카 판본에서의 '죽음'은 멀쩡하게 '황천의 제왕' 노릇 잘하고 살다가 어느 날엔가 소녀 엘리자베트를 보구서 첫눈에 반한 뒤 '그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감정 충만한 등장 인물'이다.


다카라즈카 <엘리자베트>는 그 안에서도 판본이 꽤 여러 버전으로 나뉘며, 돌아가면서 공연한 각 조(유키구미/호시구미/소라구미/하나구미/츠키구미)의 배우들마다 '특별히 잘 소화했거나 or 못 소화한 곡'은 따로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죽음이 엘리자베트를 처음 만났을 때 부르는 '愛と 死の 輪舞'는 2007년 유키구미(설조) 주인공인 미즈 나츠키(水夏希) 버전이 제일 마음에 든다.

이 배우가 가창력이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다. 다카라즈카 남역들 중엔 미즈 나츠키보다 노래를 더 빼어나게 잘하는 이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즈 나츠키가 부른 '愛と 死の 輪舞(아이토 시노 론도)'에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은.. 미즈 토토(죽음)는 이 노래 가사(죽음 캐릭터가 치는 대사=극의 대본 내용)에 나와있는 그대로 해당 곡의 삘을 제대로 살려서 노래 부르기 때문이다.(단, 이 노래 외 몇몇 곡만~ '미즈 나츠키'의 죽음과 이 버전의 여주인공인 '시라하네 유리'가 정말 못 부른 노래도 몇 곡 되는 듯..)



보통 '노래'만 잘하면 되는 건 가수고, 특정한 곡을 '빼어난 가창력으로 유창하게' 부르기만 하면 되는 건 <콘서트 무대>이다. 하지만 <뮤지컬 공연>은 다르다- '완결된 스토리를 가진 극'에서 '특정한 캐릭터'를 관객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뮤지컬 배우'가 단순히 노래를 잘하기만 해서는 안되고, 그 '노래가 지닌 정서(가사 내용)를 갖가지 모션 & 표정 연기와 더불어 극을 감상하는 이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다. 

다카라즈카를 맨 처음 접했을 때에는 그저 막연하게 그 안에 나오는 남역 톱 스타들은 으레 '연기'를 잘하겠거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 면면을 알면 알수록, 이 다카라즈카 가극단에도 의외로 연기 안돼 주시는 '발연기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표정 연기 제대로 안되고, 모션 어색한 그런 배우들.. 

예를 들어 노래 가사에는 "꽃이 활짝 피었다. 아름답다. 왠지 모르게 감동스럽다~"로 되어 있는데, 그 가사를 "땅바닥을 내려다 보며 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조그마한 돌멩이가 굴러왔다. 무심코 휙 찼다. 그리곤 다시 가던 길을 갔다~" 식으로 전혀 <엉뚱하게 표현>해 버리는 배우들이 있는 것이다. 노래 가사 따로, 배우의 표정 따로 노는... 혹은 '표정 연기'는 아예 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노래'만 자알 불러제끼는.. 뭐 그런 배우들 말이다.(참, 그건 '배우'가 아니다. 그냥 '가수'일 뿐...) 다카라즈카 <엘리자베트> 2007년 버전의 '죽음'인 미즈 나츠키(Mizu Natsuki)의 경우엔 춤 실력도 뛰어난 편이며, 노래에 제대로 감정을 실어낼 줄도 알고, 일단 '연기'가 되는 주인공이어서 마음에 든다.

비록 저음 위주의 배우이고, 다른 노래 실력 빼어난 남역들에 비해 가창력은 그리 대단한 수준이 아니지만, 1막 & 2막 두 번에 걸쳐 '죽음'이 자신의 절절한 사랑을 노래하는 '愛と 死の 輪舞(아이토 시노 론도)'를 부를 때의 미즈 나츠키(Mizu Natsuki)의 감정선은 여느 배우들에 비해 가장 뛰어나며, 표정 연기 이하 전반적인 연기력도 좋은 편이다. 무엇보다.. 이 배우의 '약간 허스키하고 음습한 듯한 음색'은 어둠의 저승 세계(명계, 지하 세계, 이승에서의 생명이 끊어진 자들이 가는 세계)를 지배하는 '죽음' 캐릭터와 상당히 좋은 씽크로율을 보여주고 있다.

미즈 나츠키의 토토(죽음)는 그렇게 탁한 듯한 음색을 지녔으면서도, 해당 노래에 대한 삘을 적절하게 잘 살려내는 '감수성 짙은 곡 소화력'을 선보인다. 그것이 '愛と 死の 輪舞(사랑과 죽음의 론도)'란 곡이 지닌 특정한 정서를 무척 잘 살려주고 있는 것 같다.(이 노래 가사 자체가 정말 '절절한 분위기'의 내용이다. 무미건조하게, 우렁차게, 딱딱하게만 부르는 건 절대적으로 이 곡에 어울리지 않는.. 그런 가사의 노래인 것이다.) 미즈 토토는 '연기'도 제대로 해주고 있다. '아, 저 죽음씨가 그래서 요 다음부터 그렇게 행동하는구나~'를 개연성 있게 잘 설명해 주는 '죽음'이라고나 할까-




이 버전
(다카라즈카 2007' 유키구미 공연)의 엘리자베트인 시라하네 유리(白羽 ゆり)의 요상한 성악 창법은 상당히 압박스럽지만, 그래두 전반적인 연기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고, 크게 예쁘진 않더라도 이 장면에서 '죽음이 어린 엘리자베트(씨씨)에게 반하는 게 나름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여주인공'이긴 하다. 이로부터 훗날에 오스트리아의 황후가 되는 엘리자베트의 애칭이 씨씨인데, 이 여배우는 일단 귀여운 느낌의 '씨씨'스럽게 생겼다.
 
프랑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DVD(2001 버전)에 나오는 세실리아 카라의 줄리엣이 정말 '세상 물정 모르고 순수한 아가 같은 줄리엣'이었기에 '나름 세상 때가 좀 묻은 나이 많은 파리스와 티볼트' 등이 그녀에게 반하는 게 설득력 있어졌듯.. 다카라즈카 2007' 버전의 <엘리자베트>에서 '평소에 사람 생명을 거둬가는 험상궂은(?) 일을 해 오던, 생긴 것도 좀 메마르고 무섭게 생긴 미즈 나츠키의 죽음'이 맨 처음에 이 시라하네 유리의 엘리자벳을 보자마자 반하게 되는 것 역시 '그녀가 아직은 본격적인 세상을 겪지 않아서 자유롭고 순수한 눈빛을 간직하고 있는 이'였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설득력이 생긴다. 극과 극의 성격은 서로 끌리게 마련이다. 특히나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거나 동경하는 그 무엇에겐 더더욱~

이 때의 미즈 토토는 그녀를 본 첫눈에 '아니~ 세상에, 저런 눈망울을 하고 있는 소녀가 있다니..!' 이런 표정이고, 어린 시씨를 연기하는 시라하네의 엘리자베트는 정말 순진무구 & 앙증맞아 보이고 귀엽다.



같은 다카라즈카 내에서도 '죽음'과 '엘리자베트'를 누가 연기하는가에 따라서 그 느낌이나 작품 성격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미즈 나츠키가 '죽음(토토 사마)' 역으로 나온 2007년 유키구미(雪組) 공연의 <엘리자베트>는 쫄깃한 반전의 묘미가 있는 버전이다.

미즈 나츠키(水夏希)의 토토(죽음)는 노래하는 음색도 음습 & 투박한 편이고, 약간 험상궂고 무서워 보이는 인상의 '죽음', 왠지 모르게 사납고 거친 녀석(?)일 것 같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렇게 까칠해 보이던 이 토토 사마
(황천의 제왕)께서 어느 날 명계에 굴러 들어온 어린 소녀에게 첫눈에 휙~ 꽂혀 가지고, 그 때부터 절절한 사랑 노래를 부르며 "그저 한 사람의 인간일 뿐인데 마음이 흔들린다는 둥.. 목숨을 빼앗는 대신 살아있는 그녀로부터 사랑받고 싶다는 둥.. 그 사랑을 얻게 될 때까지 어디고 쫓아가겠다는 둥.." 하면서 죽음의 '신'과 마찬가지인 자신과 일개 '인간'인 그녀와의 '금기의 사랑'에 목말라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딱 보기에도 '제멋대로일 것 같고, 거칠 것 없어 보이고, 무섭고, 신경질적이고, 까칠해 보이는 그 남자 주인공(황천의 제왕=죽음)'이 알고 보니 엄청난 순정파- 하지만 이제껏 한 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하면 그녀의 사랑을 얻을지 몰라서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보며 순정남 토토 사마(죽음 폐하)가 좌충우돌하는 스토리'~ 미즈 나츠키가 '죽음' 캐릭터를 연기한 다카라즈카 2007' 유키구미 공연은 바로 이런 느낌의 극이 아닐까 한다. 이런 류의 쫄깃함과 독특한 개성이 있어서인지, 난 미즈 토토 버전의 <엘리자베트>를 굉장히 재미있게 보았다. 앞으로도 쭉 이 버전을 편애하게 될 것 같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