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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극임에 발목 잡힌 '보석비빔밥', 그 대단원

타라 2010. 2. 22. 10:07
사람들마다 드라마 취향은 다 다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가족극' 형태의 드라마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결말 부분으로 갈수록... 그게 벌써 한 10여 년 전 일이었던 것 같은데, 특정 방송사의 가족극 시간대에 하는 드라마들을 몇 편 보다 보니 '각기 다른 타이틀'을 달고 있는 드라마들이었음에도 그 패턴이 너무나 비슷하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극적인 창의력' 하고는 너무도 거리가 먼 '붕어빵처럼 비슷비슷한 패턴의 가족극 드라마들'의 그 구태의연함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 함께 혼례를~? : 한국 가족극 성격의 드라마 '결말'에 항상 나오는 설정

위에서부터 '짝짓기'를 솔선수범해 보이시는 명자 할머님


우리 나라 TV 드라마 작가들은 남녀 등장 인물의 '짝짓기'에 뭐 한 맺힌 게 있는지, 그런 류의 가족 드라마들에선 대체로 '최종회 무렵'에 가면 늙은 사람이고 젊은 사람이고 거기 나오는 등장 인물들은 죄다 연결시키거나 결혼시켜서 '우리 엄청 행복해요~' 하고 햄 볶으며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원히, 더 이상의 갈등은 없을 것 같은 분위기를 하고선 말이다..

그런 류의 결말이 내 기준에선 너무 구태의연하고 재미없게 느껴졌기 때문에, 어느 순간부턴 그런 '가족극 형태의 드라마'를 자동적으로 기피하게 되었다. 굳이 '가족'이 소중하면, 현실 속에서 우리 가족끼리 최선을 다해 잘 지내면 되는 것이고, 즐기기 위해서 보는 'TV 이야기물'에서까지 그런 <그 드라마가 그 드라마 같은, 재미도 없는 빤하고 진부한 결말의 스토리>를 보고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 드라마 작가들 중에선 발군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김수현표 '주말 가족극'은 잘 안보는 이유 중 하나이다.(그것이 '시대의 흐름엔 다소 맞지 않는 3대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대가족 형태의 집착에, 등장 인물들 결혼 못 시켜서 안달 난 가족극'이기 때문에...) 난 오히려, 김수현 작가의 <가족극> 보다는 예쁜 신데렐라의 재벌가 탈출과 자아 찾기를 그려낸 <불꽃>이나, 지고지순한 여주인공이 자기를 버린 남자에게 분노하면서 독기 품다가 결국 더 나은 남자를 찾아가는 <청춘의 덫> 같은 드라마, 혹은 사회 특정 현상에 대한 문제 의식을 다룬 김수현표 <단막극> 류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이건 다분히 '취향'의 문제이리라- 나의 개인적 취향과는 다르게, 그런 류의 '그 드라마가 그 드라마 같은.. 등장 인물들 결혼 시키지 못해 안달난 가족극'을 선호하는 시청자들도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다. 내 취향은 '잘 짜여진 소설같은 기/승/전/결을 가진 사건 사고, 스토리 중심형의 드라마'이다. 혹은 기존의 구태의연한 드라마들과는 다른 독특한 정서를 자아내는 그런 류의 추상화 같은 드라마에도 흥미가 간다. 서민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은 주말극 형태에도 관심이 많이 가는 편이다. 그 안에서 느껴지는 정서가 담백하고 구수하기 때문이다..

궁씨 집안 일원이었다가, 갑자기 박씨 집안으로 시집가 버려 서운한 결명자 할머니~

둘이 잘 어울리는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어쨌든 봉 잡은 설황도씨

주인공 가족이 서민 가족이었던 <보석 비빔밥> 역시 그 범주 안에 들어가는 주말극이었기에 그간 꽤 재미있게 본 드라마인데, '전 연령대를 아우르는 등장 인물의 짝짓기 모드와 엄청난 문제를 떠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비하면 비교적 배부른 고민을 지닌 부잣집으로 그 무대가 옮겨진 극 후반부'로 접어 들어선 통 그런 느낌이 안 나서 조금 아쉬웠다.


최근 들어, 나이 드신 분들이 우스갯소리로 주고 받는 '요즘 50, 60세 넘은 과부는 오복 중의 하나다~'라는 말도 있다.( 늙어서 남편 수발 들지 않아도 되니, 혼자 지내면 행색이 초라해지는 홀아비와는 달리 '생활이 궁핍하지 않은 과부는 늙어서 남편이 없으면 오히려 몸 고생 안하고 편하다'는 말에서 유래함..) 개인적으로 <보석 비빔밥> 마지막회(50회)에서 늦은 나이에 새삼스럽게 시집 가겠다는 모친 결명자(김영옥)에게 말도 안된다며 난감해 하던 궁상식(한진희) 쪽에 훨씬 감정 이입이 잘 되었다. 노래방 할아버지와는 굳이 혼인하기 보다는 그냥 자주 왕래하는 '친구' 정도로만 잘 지내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명자 할머니의 재가로 인한 '결명자-노래방 아저씨-백조' 친구 라인 해체
정 외로우면 봉사 활동 or 문화 센터에서 취미 생활을 하면 어땠을까..?

결명자 할머니가 한평생 궁씨 집안 아이들의 할머니로서 잘 살아오다가, 뒤늦게 다른 할아버지랑 혼인하여 박씨 집안 아이들의 할머니가 된다는 것이 모양새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요즘엔 각 복지 회관마다 노인들이 새로운 걸 배울 만한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좀 부지런한 할머니들은 외롭거나 심심할 틈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또한.. 세상 구석구석엔 더 비참하고 외로울 법한 삶을 살아가는 불쌍한 노인들도 많은데 '평소에 자주 왕래하는 가까운 곳의 가족도 있고, 몸도 건강하고, 친구도 있는 극 중 인물'이 너무 외로워 하니까 극을 지켜보는 입장에서 그것이 가슴으로 확 와 닿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며느리를 그 누구보다 아끼고, 상태 무척 양호한 수월한 치매 시어머니 & 만능 며느리~

이 드라마는 한 가족 구성원의 '치매'를 소재로 끌어다 썼다. 그런데, 그런 구성원을 지닌 가족들의 애환에 대한 '진정성'이랄까.. 그런 게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총 50부작인 <보석 비빔밥> 마지막회에서 결국 알츠하이머병(치매)에 걸린 이태리 여사가 저 세상으로 떠나긴 했지만, 그 이전에 며느리가 된 비취가 수발 들기에 큰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치매 걸린 이태리(홍유진) 여사의 상태는 너무나 양호한 편이었다.(오히려 함께 있으면 재미있고, 귀엽기까지..;;)

그래서 비취 결혼 이후, 그가 모시는 시어머니 이태리 여사를 보면서 내내 '저건 별로 치매 걸린 것 같지도 않은데~? 이미 '가정부'에 '간병인'도 있고.. 며느리인 비취(고나은)가 수발하기에 크게 고생스러울 것도 없는 걸로 봐선, 과거 시점의 영국(이태곤)이 자기 엄마 치매 걸린 사실 알고 비취 고생 안시키겠다고 몰래 훌쩍 떠났던 설정이 꽤 뻘쭘해지는 상황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계속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최근 TV에서, 드라마 <보석 비빔밥>에 나오는 '간병인도 여러 명 둘 수 있고, 며느리도 지극정성이며, 치매도 치매 같지 않게 무척 얌전하게 걸린 부잣집 마나님' 설정은 사치로 느껴질 정도로 '훨씬 더 열악한 환경에서 억압 받는 치매 걸린 노모'가 등장하는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우리 주변에 엄연히 실재하는 사건'을 들여다 보다가 막상 '드라마 속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다소 장난 같은 가벼운 설정'을 접하게 되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물론, 주말극 <보석 비빔밥> 속에서의 치매 시어머니를 그렇게 처절하게 그려내긴 힘들었을 것이다. 일단 해당 드라마의 성격에 맞지 않고,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오래 돌아온 끝에 영국(이태곤)과 맺어진 비취(고나은)가 그런 불행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는 걸 원치 않았을 것이므로... 그럼에도, 이 드라마 속에서 그려낸 '치매 설정'엔 여러 면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아침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유명을 달리한 이유는?

마지막회에 나온 이태리 여사의 급작스런 죽음 역시 자연스러운 흐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좀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사람이 딸의 결혼식에 가던 차 안에서 갑작스럽게 죽어 버렸으니.. 치매 자체가 죽을 병은 아니기 때문에, 더더욱 이 설정이 의문스럽다. 아무리 드라마가 꾸며진 극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나오는 세부적인 설정들에 나름의 과학적인 근거와 논리는 있어야 하기에...


젊어서 마음 가는 대로 실컷 놀아도 늙으면 알아서 복 받는 궁상식-피혜자는 진정한 승리자?

결과적으로 <보석 비빔밥> 등장 인물들 중 '본인이 평생 해 온 일에 비해 가장 크게, 과분하게 복 받은 인물'은 궁상식(한진희)과 피혜자(한혜숙)가 아닐까 한다. 극 안에서 나름 자식과 남편을 위해 헌신해 온 이태리(홍유진)는 이른 나이에 치매까지 걸리고 한창 더 살 나이에 세상을 뜨지만, 젊은 시절 자식들한테 민폐 끼쳐가며 나름 호탕하게 잘 놀면서 살아온 궁상식 부부는 늙어서 운이 크게 트인 느낌이다.

젊은 시절, 돈 사고도 많이 치고 자기 욕망에 충실하면서 무수하게 자식들 속 썩였던 이 궁상식(한진희)-피혜자(한혜숙) 부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회갑 잔치' 거하게 하며 앞으로 계속 잘 먹고 잘 살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니.. 결국 자기 딸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것도 보지 못하고, 미래에 태어나게 될 외손주 얼굴도 못본 상태에서 눈 감은 '불쌍한 이태리 여사'에 비하면 정말 복 받은 인생이 아닌가-

이 드라마 속에서 '궁상식-피혜자 부부'가 한 평생 덕을 많이 쌓았거나, 남을 위해 헌신했거나, 자식 농사를 잘 지은 것도 아니다.(그들이 자식 농사를 공들여서 잘 지은 게 아니라, 그 집 자식들이 착해서 알아서들 잘 컸을 뿐..) 오히려 뻔뻔하고 이기적인 행동을 많이 하면서 살아 온 철없는 부부인데, <보석 비빔밥>에 나오는 그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유형의 궁상식-피혜자 부부에겐 어찌 그리 자식복이 많은데다, 늦복이 터졌는지.. 대략 미스테리할 따름이다..

끝날 때 되니까 대충 인연 찾아서 짝을 맞추는 병훈과 루비 : 진실된 사랑인가, 아닌가~

미칠듯이 사랑하지는 않는 여자 때문에 무릎까지 꿇는 남자?

극 중 루비(소이현)가 결혼한 유병훈(윤종화)과 그 모친이 좀 별나고 철딱서니 없긴 해도, 현실적으로 충분히 있을 법한 '속물' 캐릭터이고 그들이 딱히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친 것도 아닌데 '병훈 모친이 추진했던 부잣집 딸과의 결혼이 한 번도 아니고 무려 두 번씩이나 결혼식장에서 엎어지는 재수없는 일을 겪게 된 것'은 좀 작위적인 설정이 아닌가 한다.


나중에 깨달음(?)을 얻긴 했지만, 그 속물스러움으로 따지자면 애초에 병훈이 '돈 많은 집 의사'인 걸 알고 꼬신 '루비'나 '병훈네 가족'이나 도찐개찐 아닌가- 무엇보다, 두 번 씩이나 다른 여자랑 결혼할 마음을 품은 걸 보면 병훈(윤종화)의 입장에서 루비(소이현) 없으면 못살 것처럼 미칠듯이 막 사랑했던 건 아니라는 얘기인데.. 결혼 깨지고 나서 그런 루비를 부인으로 맞기 위해 번번히 병훈이 공을 들이고 굴욕적인 상황을 참아낸다는 설정은 어딘지 좀 어색하다.

병훈네 입장에선, 막상 결혼 엎어지고 나니 그나마 옛날 애인 루비가 만만해서 그 대안으로서의 희생양 삼는 것일까..? 아님, 병훈이 다른 여자와의 결혼이 깨질 때마다 새삼스럽게 '루비에 대한 미적지근했던 사랑이 퐁퐁 솟아나는 샘물처럼 마구마구 샘솟는 것'일까..? 카일이 떠난 이후로 내내 그를 그리워 하다가 결말에 가선 결국 병훈(윤종화)과 혼인한 루비(소이현)의 경우엔, 카일이 스님 돼서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니까 진심으로 막 사랑하는 게 아님에도 '꿩 대신 닭 모드'로 병훈과 결혼하게 된 것일까..?

세상에 흔히 있을 법한 속물 모자의 재수없는 결혼 사기극으로 손 안대고 코 풀게 된 루비~

예전에 주변에서 그런 사례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종합 병원 간호사인 한 여성이 그 병원 의사랑 연애를 했고, 서로 많이 사랑했는데 집안 반대로 결국 헤어졌다고 한다. 아들이 의사이긴 하지만 남자 쪽 집안이 부유하지 못해서 그 집에선 돈 좀 있는 며느리를 보길 원했는데, 그 여성은 직업도 간호사이고 집안 환경이 넉넉치 못했기 때문에 부모의 결혼 허락이 떨어지지 않아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가슴 아픈 사연이지만, 이게 굉장히 '현실적인 스토리'이기도 하다. 사람 인품 훌륭해 봤자,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어느 정도 속물스런 부분을 다 가지고 있기에... 직업에 귀천이 없다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선 양 집안 간의 혼인을 추진함에 있어 그런 어울림을 많이 따지는 게 사실이고, 그런 '이 세상에 흔히 있을 법한 현실적인 조건'만 따지자면 재산 많은 의사 병훈의 입장이 평범한 집 간호사 루비에게 숙이고 들어갈 정도로 처지는 조건은 아니다.

병훈이랑 결혼할 뻔 했던 여성들이 알아서 '결함' 있어 주시는 바람에
'처지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결혼 후 공주 대접 받게 된 신데렐라 루비


그럼에도 자신에게 꼴두 보기 싫고 목소리도 듣기 싫다 했던 루비에게 석고대죄까지 하며 매달리는 병훈, 세속적 잣대를 들이대면 상대적으로 조건이 처지는 것도 사실인 루비네에 무릎까지 꿇어가며 며느리 삼는 병훈모의 설정을 보면서 현실 속 상황과 약간의 괴리감을 느꼈다.

결과적으론 '병훈이 알아서 이상한 여자들이랑 혼사가 엮이는 바람에, 진정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별다른 노력도 수고도 하지 않던 평범한 간호사 출신의 루비는 졸지에 손 안대고 코 풀게 된 격'이 아닐까 한다.


가장 독창적이고 개성(?) 넘치는 결말의 캐릭터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카일의 해탈~

주말 드라마 <보석 비빔밥> 결말부를 통해, 그나마 건진 건 해탈한 듯한 카일(마이클 블렁크)이다.


세상의 반이 남자이고 반이 여자이건만, 서로 '사돈지간인 호박
(이일민)과 끝순(최아진)이 굳이 혼인하는 겹사돈 설정으로 가서 2세들의 호칭 문제가 복잡해지고 두 가정의 가계도를 교란시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도 마음에 드는 대목이다. 언젠가 극 중 큰 스님이 '카일은 속세에 나가 결혼해서 애 낳고 살 것'이라 했던 것 같은데, 마지막회를 통해 결국 그리 되진 않았다.(선견지명 하고는 거리가 먼 인물이 되어버린 큰 스님, 지켜주지 못해 죄송..;;) 극 전반을 통틀어 루비(소이현)랑 잘될 듯 하다가, 결국 나오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절로 들어가게 된 카일 스님.. 부디 성불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