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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엘리자벳' 2004 헝가리판 (2)황후의 속드레스

타라 2011. 7. 6. 23:12
오스트리아 뮤지컬 '엘리자베트(Elisabeth)' 헝가리 버전에서 '죽음(Tod)' 캐릭터가 등장하는 첫장면과 끝장면은 수미상관스런 구조를 취하고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모 극단의 K 감독(이하 헝가리 감독)이 연출한 뮤지컬을 몇 편 접하면서 적잖은 문화적 충격을 받았는데,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으나 보면 볼수록 그는 무척 '유능한 감독'이란 생각이 들었다. 구석 구석 '읭?'스런 구석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이 헝가리 감독은 작품을 통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바'가 명료하며, 그가 연출한 각각의 씬이 쓸데없이 낭비되거나 늘어나는 일 없이 서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진 채 긴밀하게 짜여져 있다.

헝가리 이 극단에서 유럽의 여러 작품들을 가져와 무대에 올렸는데, 이 감독은 번번히 그 작품들에 '자기만의 색깔'을 입혀서 새로운 느낌의 이야기물로 바꿔 놓곤 했었다. 그의 대표 재가공작으로 '셰익스피어 원작을 가져와 제라르가 각색한 프랑스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을 들 수 있다. 워낙에 제라르 프레스귀르빅의 음악이 좋기도 하고, 작품 자체의 미덕도 있어서인지 헝가리 감독이 자국어 버전으로 연출한 것 중엔 이 뮤지컬(로미오와 줄리엣)이 제일 재미있다.

<로미오와 줄리엣(로미오 앤 줄리엣)> 만큼은 아니었으나, 미하엘 쿤체 & 실베스터 르베이 콤비의 오스트리아 뮤지컬 <엘리자베트(엘리자벳)> 헝가리 버전 공연 실황(DVD)도 나름 흥미롭게 감상했다. 이 헝가리 감독이 연출한 작품들에선 왠지 모를 B급 정서가 느껴지기도 하는데, 나름 품위 있고 우아한 프랑스판 <로미오와 줄리엣>이 헝가리판에선 무슨 지하 세계 & 해적선 같은 분위기의 세트 안에서 약간의 기괴한 센스가 가미된 채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뛰어넘는 새로운 작품으로 탈바꿈하였다.


오스트리아 공연에서 오페라 감독 출신의 하리 쿠퍼가 연출했던 뮤지컬 <엘리자베트> 역시, 헝가리의 K 감독이 연출한 건 분위기가 좀 다르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건 이 감독의 치밀한 디테일 & 소품 활용 센스였는데, 헝가리 '토드(죽음/Tod)'가 맨 처음 등장할 때 요상한(?) 물건을 하나 들고 나온다. 헝가리판 <엘리자벳> 마지막 장면에도 등장하는 소품이다. 그것은 바로, 루케니의 습격에 의해 '이승'에서의 삶을 끝내고 엘리자베트(Elisabeth)가 '저승' 문에 들어설 때 입고 있던 속 드레스~

<엘리자베트> 오스트리아의 원 버전 공연에선 루케니의 칼에 찔린 엘리자베트가 저승 세계에서 다시 깨어난 뒤 삶에서의 속박을 벗어던지듯 검은 외투를 벗고 '하얀 드레스의 속옷 차림'으로 스스로 걸어가 '죽음' 캐릭터 앞에 서는데, 헝가리 버전에선 그대로 의식을 잃은 엘리자베트를 저승 사자(죽음 수행원)들이 들쳐메고 '저승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토트(죽음)'에게로 데려가는 설정이다.


죽음의 세계로 건너 간 '하얀 속드레스 차림의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살아왔던 세계(or 죽음의 세계로 건너가는 길목)를 한 번 둘러본 채 '죽음(토트)'씨와 함께 저승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그로부터 잠시 후 '죽음' 캐릭터가 그 때 엘리자벳이 입고 있던 '하얀 속드레스'를 관객을 향해 창 밖으로 휙~ 보여주는 게 <엘리자베트> 헝가리 버전의 마지막 장면이다.(그 아래에선 루케니가 스스로 목을 매고 있음)

그러니까, 이 헝가리 판본의 엘리자벳은 알몸으로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감독의 자세한 의중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이상한 걸 상상하면 곤란할 듯.. 잘은 모르겠지만, 기왕 삶에서의 모든 속박을 벗어던지고 저 세상으로 가는 거면 '입고 있던 옷가지마저 다 내려놓고 가야 된다~'는 뭐, 그런 의미 아닐까..? (설마, 여자 속옷에 집착하고 색을 밝히는 변태 토트.. 이런 의미는 아니겠지? ;;)

원래 인간은 이 세상에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존재'이다. 한 때 거대한 제국의 황후였다 할지라도, 엘리자베트(씨씨) 역시 예외 없는 인간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저승 문'을 통과한 엘리자벳을 벗기는 것 같은데(그녀가 실제로 벗고 있는 장면은 극 안에 나오지 않음), 여러 면에서 이 극단의 헝가리 감독이 등장 인물(출연하는 배우)들 옷 벗기는 걸 좀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헝가리판 <엘리자베트>에선 루돌프 황태자가 죽을 때도 웃통 벗고 죽는다. '마리 베체라'를 의미하는 여성과 춤을 추다가, 그녀가 '루돌프'의 셔츠를 확 잡아당기는데 이 황태자가 그 상태로 죽으러 가는 것이다. 이 감독이 연출한 헝가리판 <모차르트!>의 '왜 나를 사랑하지 않나요' 장면에선 '볼프강 모차르트'가 홀딱 벗는 설정이 등장하기도 한다.(볼프강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해 달라'고 절규하는 장면이기에, 각종 가식과 위선 & 겉치레를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알몸 모차르트'로 존재해야 했던 걸까?)

그런 설정(극의 한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이 홀딱 벗는 씬)이 한국판 <모차르트!>에도 나오면 어떻게 될까...하는 발칙한 상상을 잠시 해 보았다. ;; 아무튼 헝가리 감독의 연출 방향이 그러하니, 이 극단의 헝가리 배우들은 종종 '벗으라면 벗겠어요~' 모드가 되어야 했던 모양이다.(개인적으로, 배우들이 너무 벗는 건 부담스러워서 별로~)


<엘리자벳> 헝가리 공연의 <죽음(토드) 캐릭터가 등장하는 첫 장면>에서, 그는 마지막 장면에도 나오는 엘리자베트 황후의 그 '속 드레스'를 들고 나온다. '죽음(Tod)'씨가 '엘리자베트(Elisabeth)가 저승 세계로 올 때 입었던 하얀 속옷 드레스'를 들고서 뭐라뭐라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그녀의 과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헝가리 감독은 이런 식으로 자잘한 '소품'을 활용하는 연출을 즐겨 하는 편이다.

오스트리아 원 버전에선 '체스판 위에서 말 달리기'로 연출된 '조피 모후(요제프 황제 어머니)와 대신들의 작당씬'이 헝가리 <엘리자벳>에선 다르게 연출되었는데, 이 장면에서도 작은 '소품'이 사용된다.


엘리자베트 황후를 견제하려 하는 조피 모후(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어머니)의 지휘 아래 여러 대신들이 "타도! 엘리자벳~" 하듯이 긴 막대기를 들고서 한 표적을 겨냥하는데, 그것이 바로 '엘리자베트의 형상을 한 작은 석상'.. 너무 직접적이긴 하지만, 이런 식의 연출도 그리 나쁘진 않은 것 같다.

헝가리 버전 <엘리자베트>에서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이 판본에서의 '죽음'씨는 처음부터(본격적인 엘리자베트=시씨의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 '루케니'에게 칼을 쥐어준 채 "자.. 내가 칼을 줄테니, 엘리자벳 잡아 와~" 이런 식의 모드로 시작한다. 전형적으로 잘생긴 건 아닌데, 이 작품에서 '죽음' 캐릭터를 연기한 헝가리 뮤지컬 배우 서보씨(Szabo P. Szilveszter)는 은근 매력적이다..

'토트=죽음'이 칼 주면서 '엘리자베트' 잡아 오라니까
너무나 좋아하는 헝가리의 해맑은(?) '루케니' 아저씨

그 후 '2인 복식조'로 활약하는 '죽음-루케니' 중, 죽음(토트)씨로부터 '칼'과 '엘리자벳의 하얀 속옷 드레스'를 건네 받은 루케니가 앙상블과 같이 단체송을 부르다가 '엘리자벳의 그 하얀 속 드레스'를 패대기 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헝가리판 <엘리자벳>은 이런 장면들에서 소소한 웃음(?)을 주는 것 같기도...

이 헝가리 감독이 연출한 뮤지컬을 보면 의외의 '디테일한 부분'들이 눈에 띄는데, 헝가리 루케니는 '본격적인 극의 화자' 모드로 전환하기 전까진 (극의 앞 장면에서) 계속해서 목에 밧줄을 걸고 나온다. 



쿤체 & 르베이 콤비의 이 뮤지컬 첫 장면 자체가 '감옥에서 목을 맨 루케니가 죽어서 염라 대왕 앞에 가 심문을 받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애초에 목 매서 염라 대왕 앞에 간 그이기에 이 루케니는 계속 밧줄을 걸고 나오다가 '과거 시점의 엘리자베트 이야기'를 하기 바로 직전에 밧줄을 목에서 떼어낸 뒤, 그제서야 극의 화자로 돌아가 시씨(엘리자벳) 관련한 일화를 본격적으로 관객들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뮤지컬 <엘리자베트(Elisabeth)>에 나오는 '루케니'란 캐릭터가 '극 안의 인물'이면서 '극 밖의 인물'이기도 한데, 그런 식으로 캐릭터의 특징을 세밀하게 구분하기 위한 헝가리 감독의 여러 '디테일한 설정'들이 꽤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 기괴하고 오묘한 분위기의 연출 센스와 더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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