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물거품 기피증' 갖게 만든 동화 작가, 안데르센

타라 2011. 1. 9. 23:53
안데르센은 어린 시절 내가 재미나게 읽었던 여러 동화 이야기들을 집필한 유능한 작가이자, 최초로 나를 열 받게 만든 작가이기도 하다. 보통 어린이용 동화는 '착한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평화를 되찾고 행복해지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는데,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 공주>는 찜찜한 비극으로 끝이 났고, 그건 내가 머리털 나고 최초로 접한 '비극적 결말의 이야기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앗쌀하게 슬픈 비극적 결말'이 아니라, 참 '찜찜하고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비극적 결말'이었다는 것- 당시, 어린 마음에도 '이게 뭐지..? 인어 공주를 이렇게 만든 작가 아저씨 미워요~'를 외쳐댔으니 말이다.. 그 시기에 읽었던 다른 동화들 중에도 나름 슬픈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 있었지만, 안데르센(Andersen)의 <인어 공주>처럼 기분 나쁘게(?) 슬프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Andersen(1805~1875)

덴마크에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은 아버지마저 일찍 여의어서, 어린 나이에 벌써 생활 전선에 뛰어드는 등 무척 가난하고 힘들게 자라났다고 한다. 일찍부터 연극 대본을 쓰기 시작한 그는 이런저런 고생 끝에 서른 살 무렵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재능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다. 세상엔 그보다 더 늦게 진가를 발휘하는 '대기만성형 인간'들도 참 많은 걸 감안하면, 30세 무렵에 벌써 작가로서 인정받은 안데르센의 이력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듯하다.

이후 40여 년동안 150편이 훨씬 넘는 동화 작품을 발표한 안데르센은 유명 작가로 나름 이름을 날렸으며 그가 1875년에 병사했을 땐 그 장례식에 덴마크 국왕 부부가 참석할 정도였다 하니, 가난한 구두 수선공 아들치곤 꽤 성공한 인생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필수 코스로 한 번쯤 읽어 봤음직한 <미운 오리 새끼> <성냥팔이 소녀> <엄지 공주> <벌거숭이 임금님> <분홍신> <인어 공주> 등등이 모두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이 지은 동화이다.

내가 어린 시절에 접한 안데르센 동화 <인어 공주(The Little Mermaid)>는 이런 내용이었다.

평화로운 '바닷 속 왕국'에서 나름 '공주'로서 잘 살고 있던 '인어 소녀'가 15세 생일을 맞아 평소에 궁금해 했던 바다 위로 나들이 나왔다가 한 왕자에게 반하고, 그가 탄 배가 난파되자 죽을 위기에 처한 왕자를 구해준다. 그 때 분명, 왕자를 구해준 건 인어 공주였다-

Mermaid
Mermaid by Jolante 저작자 표시

하지만 왕자가 눈을 뜨려는 순간 마침 '이웃 나라 공주'가 다가왔고, 인간들에게 모습을 들키면 곤란한 인어는 바위 뒤로 자기 모습을 숨기게 된다. 그래서 이 머저리 왕자는 인어 공주가 자기를 구해줬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그 때 다가온 이웃 나라 공주가 자기 '생명의 은인'인 줄 알고 둘이 좋아지게 된다.(이 대목에서, 왕자가 눈을 뜨려는 순간 갑자기 다가온 이웃 나라 공주가 너무 미웠던 기억이...)

인어 공주가 마침 쿨한 성격이어서 '어쩌다 인간 세상에 나와 착한 일 한 번 했다' 생각하며 잊으면 될텐데, 첫눈에 왕자에게 반하여 상사병에 걸린 이 '인어 공주'는 내내 그를 그리워하다가 마녀에게 목소리를 저당 잡히면서까지 잠시 인간으로 변신하여 왕자 곁에 머물게 된다.

그 지점에서, 당시 독자였던 나는 '둘이 가까이 있으니까, 인어가 생명의 은인이라는 걸 왕자가 어떻게든 알게 되지 않을까..? 왕자가 이웃 나라 공주 말고, 인어의 사랑과 그녀한테 목숨을 빚진 걸 깨닫고 인어 공주랑 잘 됐음 좋겠다~'란 생각을 했었다. 그 동화의 중간 부분을 읽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안데르센 선생께서는 동화 <인어 공주>를 읽는 어린 독자의 그 안타까워 하는 마음을 깡그리 무시하고선, 결말에 <왕자는 끝까지 '인어 공주가 자기 생명의 은인'이란 사실을 모른 채 '어부지리로 왕자의 사랑을 받게 된 이웃 나라 공주' 하고만 러브러브~하다가 결혼해 버리고.. 상사병에 걸린 '인어 공주'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면서, 사악한 마녀의 덫에 걸려들어 이상한 거래를 하고 결국 왕자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혼자 쓸쓸히 바닷 속 물거품으로 사라진다~>는 내용으로 끝을 맺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결말이 어찌나 짜증이 나던지.. 항간엔 그것이 '애틋한 러브 스토리다. 이룰 수 없는 안타까운 사랑을 그려낸 아름다운 순애보다' 식의 평가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전혀 공감 가지 않는 평이다. 남녀 주인공 둘이 서로 좋아하고, 그 사랑으로 인해 한 연인이 희생해야 그게 상대방에 대한 숭고한 사랑으로 여겨질 수 있을텐데, 동화 <인어 공주>의 경우엔 그런 사례가 아니지 않은가-

<인어 공주>는 그저 '인간 세상을 동경하던 한 인어 나라 소녀가 자신의 가치와 과거의 행위(왕자의 생명을 구해준 것)를 전혀 알아주지도 않고 다른 여자와의 사랑에만 푹 빠져있는 왕자를 위해, 저 혼자 실컷 애태우다가 나쁜 마녀의 꾐에 넘어가 개죽음 당한 이야기'처럼 느껴졌을 따름이다.


이 <인어 공주>는 안데르센이 갓 작가가 되었을 무렵인 초창기에 썼던 동화인데, '여주인공에게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이 요상한 스토리'를 무슨 대단한 순애보라도 되는 양 포장한 동화 <인어 공주> 내용에 불만 품은 일부 독자들 사이에선 '안데르센의 성장 과정이 너무 힘들었고, 작가 되기까지 많은 천대를 받으며 힘들게 살아와서 저런 찜찜한 이야기나 휘갈겨 놓은 게 아니냐~'는 혹평도 있었더랬다.

어차피 특정한 이야기물을 쓰는 '작가'란 직업도 그가 창작한 내용을 받아들이는 '대중'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인데, 그 극 내용에 대한 평가는 해당 이야기물의 소비자들(독자, 시청자, 관객..)이 하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동화 <인어 공주>에 관해선 그 내용을 보고 "정말 슬픈 동화였다. 가슴 아픈 아름다운 이야기이다.."로 받아들인 독자들 못지않게 "나, 어린 시절에 <인어 공주> 읽고서 열 받아 죽는 줄 알았음. 작가 짜증나~" 류의 불만을 쏟아낸 독자들도 만만찮게 존재하는 걸로 알고 있다.

안데르센이 지은 동화 <인어 공주>에 대한 한 줄 감상 :
"주인공 인어 공주가 결국 이렇게 되다니~ 말도 안돼..!"

이런 내용이 만약 요즘의 TV 드라마 같은 걸로 각색되어 만들어졌다면, 주인공 '인어 공주'에 닥빙한 시청자들이 "결말에 인어 공주를 물거품 만들지 말아 주세요~" 내지는 "안데르센, 당신 인어 공주 죽이면 곧 작가 생활 끝날 줄 아시오!", "이쯤에서 이웃 나라 공주는 빠져주고, 왕자랑 인어 공주랑 행복해지는 결말을 보고 싶어요~" 식의 항의가 빗발쳤을지 모른다. 안데르센이 옛날 사람이어서, 저런 '보고 나면 기분 꿀꿀해지는 이야기물'을 발표해 놓고도 그나마 욕을 덜 먹은 게 아니었을까..?

비록 어린 시절 <인어 공주> 결말에 분기탱천하며 몇 날 며칠 찜찜해 했던 기억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안데르센(Andersen)의 동화 중 재미있게 읽은 것도 많다. 다만.. 당시 <인어 공주> 결말의 충격이 너무 컸던 탓에, 동화 작가 '안데르센'에 관해선 '아직 열 대여섯 살 밖에 안된 어린 인어 소녀를 일방적으로 희생시키다가 결국 물거품으로 사라지게 만든 만행을 저지른 가학적 취향의 작가란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버렸을 뿐.. 덕분에 '물거품'이란 단어까지 부정적인 이미지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