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토크

비장의 미학, 중국 뮤지컬 '디에'-양산백의 처형식

타라 2009. 7. 7. 14:27
최근 중국 뮤지컬 <디에(蝶)-버터플라이즈>에 나오는 넘버 중 리레이(李磊/Li Lei) 버전의 '심장(心腸)'이란 곡을 듣다가 급작스런 삘을 받아서 다시 포스팅해 본다. 이 뮤지컬의 '스토리'가 조금 약하긴 했지만, 지나고 보니 (진짜 재미없고 감흥 없는 뮤지컬에 비하면) 전혀 별로인 뮤지컬은 아니었던 듯하다.

얼마 전 다른 뮤지컬들을 보고 왔고 그 중에는 한국에서 나름 히트 친 뮤지컬도 있었는데, 이상하게 나한테는 별로로 느껴졌다. 특히 '대사' 많이 들어간 연극 비슷한 뮤지컬, 딱히 나쁘진 않지만 그렇다고 딱히 듣기 좋지도 않던 특징 없는 노래들로 나열된 타 뮤지컬을 보면서 '역시 전형적인 (나름 한국에서 대중적이라 일컬어지는) 뮤지컬은 나하고는 코드가 맞지 않는구나..' 싶으면서, 대체로 '예술적인 안무'와 '음악적 미덕'을 중시하는 프랑스 뮤지컬 등 유럽 뮤지컬 쪽이 더 내 취향이란 사실을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중국 최초의 대형 창작 뮤지컬인 <디에(蝶)-버터플라이즈> 역시 유럽 뮤지컬 팀이 만든 작품이어서 기본 형식은 비슷한데.. 맨 처음에 보고 왔을 땐(몇 달 전) 1막에 나오는 넘버들이 많이 지루하게 느껴져서 별로라고 생각했지만 노래가 점점 익숙해질수록 괜찮게 들리기 시작했으며, 얼마 전 모 방송사에서 해 준 공연 실황 영상을 봤을 땐 '조그마한 영상'으로 보았음에도 이젠 어느 정도 익숙해진 작품이어서 그런지 꽤 볼 만하게, 재미나게 느껴졌다. 
 
처형대 위에 선 한 사내 : 극을 통해, 정말 오랜만에 느껴볼 수 있었던 '비장미'~


지난 번에 못다한 이 뮤지컬에 관한 썰 중 가장 하고 싶었던 얘기는.. 몇 달 전, 공연장에서 직접 느낀 중국 뮤지컬 <디에>에서의 강렬한 분위기의 '비/장/미'.. 바로 이 대목이다. 개인적으로 이 뮤지컬을 관람하면서 가장 좋은 인상을 받았던 부분인데, 2막에서의 그 독특한 분위기 때문에 1막에서의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꽤 볼 만한 뮤지컬이라고 느낄 수 있었다. 영화든, 드라마든, 뮤지컬에서든.. 난 이렇게 '비장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장면이 참 좋다.


예전엔 우리 나라 드라마 중에도 그런 분위기 느껴지는 작품이 꽤 있었는데, 요즘엔 전반적으로 극 분위기가 많이 가벼워져서 좀처럼 그런 극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 와중에, 얼마 전 중국 뮤지컬 <
디에(蝶)>를 보면서 2막 후반부에서 사정없이 느껴지는 그 특유의 '비장감' 때문에 꽤 깊은 인상을 받았더랬다.

똑같이 중국 설화인 '양산백과 축영대' 스토리를 모티브로 해서 만들었지만 예전에 봤던 서극 감독의 영화 <양축> 경우엔 남자 주인공 '양산백'이 병 들어서 죽는 설정이었는데, 이 뮤지컬에선 결국 나비 인간들의 족장에게 붙잡혀 화형 당하는 결말이었다.

뮤지컬 <디에>에서 양산백의 그 '화형식' 장면은 LED 화면의 힘을 빌어 표현되었다. 지난 번에 방송사에서 해 준 이 뮤지컬의 공연 실황 '다시 보기' 영상을 보면서, 양산백의 화형식이 거행되고 축영대(딩베이베이)가 양산백(리우앤)이 있는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갈 때 흘러 나오던 '장엄함 분위기의 음악(이 뮤지컬에서 축영대가 부르는 대표 솔로곡과 같은 멜로디의, 아주 애절하고 감성적인 느낌의 연주곡)'과 그 후 '불꽃이 나비 모양으로 화하는 영상 효과'가 너무 멋있어서 몇 번이고 되돌려 봤던 기억이 있다.

그 때, 그 자리 : 현장에서만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그 강렬한 느낌


하지만 영상으로 보는 것과 공연장에서 직접 본 것과 아주 큰 차이가 나는 대목도 있었다. 내가 중국 뮤지컬 <디에(나비)>를 공연장에서 직접 보면서 특히 깊은 인상을 받은 장면은 그 '불꽃(화형식) 장면'도 그렇지만, 그 이전에 양산백(리레이-李磊)이 한 2층 높이 되는 무대 정중앙의 높은 곳에서 양팔이 뒤로 묶인 채 처연한 분위기로 서 있던 그 '화형식 직전의 장면'이었다.

그 높은 단(처형대) 아래 무대에서는 극 중 축영대의 생모(취객)가 나타나 족장에 얽힌 과거의 사연과 축영대에 얽힌 출생의 비밀을 밝히는 등 족장, 취객, 축영대 등과 나비 인간들의 노래가 이어졌고 그러는 동안 남자 주인공 양산백(리 레이)은 내내 높은 단 위에 서서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걸 현장에서 직접 보니까 굉장히 오묘한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 뭐랄까, 예전에 문학 시간에 배웠던 '비장미'와 같은.. 가슴 싸~해지는 그런 느낌..?

꾸며진 이야기물에서 주인공이 막 처절한 상황에 처하게 되거나 무지막지한 비장미가 느껴지는 대목에서 다가오는 특유의 감동(너무 슬프고 처절하거나 비장해서 느껴지는 특유의 '카타르시스'라고 해야 하나..?) 같은 게 있기 때문에 그 느낌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극을 통해 간만에 그런 느낌을 받게 되어 그것 때문에 이 뮤지컬이 꽤 인상적으로 느껴졌었다.

저 높은 곳에서, 보는 이를 압도하던 '비참한 운명의 주인공'이 안겨다 준 카타르시스..

그런데.. 그 때 받았던 그 느낌에 '좌석의 영향'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 같다. 영상을 통해서 본 그 장면은 카메라가 정면, 그리고 전체 화면을 비췄었고 현장에서 본다 하더라도 2층 이상의 좌석에서 보면 그 단이 눈높이랑 비슷하거나 눈 아래에 있기 때문에 그런 느낌이 안 났을텐데.. 그 때 내가 앉은 좌석은 1층 앞좌석이었기에 그 처형대 위의 양산백(리 레이)이 내 눈높이 보다 훨씬 위에 있었고, 매우 가까이 있었는데, 딱 그 위치에서 보니까 그 장면에서 느껴지던 특유의 그 '비장감'이 장난 아니더라는...

얼마 전 방송사 공연 실황에서 보여준 영상에선 리우앤(刘岩/Liu Yan)이라는 배우가 '양산백' 역을 맡았었고, 내가 본 공연에서는 리레이(李磊/Li Lei)가 '양산백'으로 나왔었는데 둘 다 가창력이 뛰어난 배우였다. 목소리가 비슷한 듯 하면서도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음색이었는데.. 공연 실황에서 본 리우얜은 다른 배우랑 노래하다가 한 번씩 이 배우 쪽으로 넘어오면 평음부에서 그 목소리가 굉장히 매력적이고 감미롭게 들려서 인상적이었으며, 이 뮤지컬 대표곡인 '심장(心腸)'이란 곡 후반부의 고음 부분은 리레이가 조금 더 깨끗하게 소화했다.

리 레이(李磊)의 음색으로 불리워지는 '심장(心腸)'은 곡 전반적으로 거부할 수 없는 오묘한 매력이 팍팍 느껴지기도 하였다. '심장(心腸)' 곡 후반부의 남자 파트가 무지막지하게 높은 음인데, 리우 앤(刘岩)의 경우엔 한 번씩 그 대목(후반부 고음 파트) 부르다가 목소리 약간 뒤집어지는 느낌.. 허나 전반적인 노래 느낌이나 음색, 가창력 자체는 둘 다 좋은 편이었다. 

체형 면에선.. 둘 다 풍채가 좀 있었지만 리우앤(Liu Yan)은 보다 호리호리한 느낌이었고, 리 레이(Li Lei) 쪽은 키가 큰 것 같으면서 살짝 풍채(살집) 있는 몸매였는데, 리 레이의 그 풍채 있는 체형 때문에 화형식이 거행되기 직전의 그 '처형대' 장면에서 굉장히 강렬한 느낌을 받은 것 같다.(뭔가, 압도 당하는 듯한 거대한 물결의 비장감 같은...)

처형 당하기 전날 밤, 나뭇잎은 바람에 나부끼고~ : 내겐 여전히 '심장'이 있으니..

그 장면 이전에도 축영대랑 같이 도망 갔다가 체포 당한 양산백이 옥에 갇히고, 꼼짝 없이 밧줄에 묶여서 막 얻어맞고 괴로워 하면서 고초를 겪고.. 나중엔 쇠사슬에 묶여서 나오는 장면도 있었는데, 축영대랑 마지막으로 러브송(이별 노래) 부르러 나왔을 때 양산백이 움직일 때마다 그 쇠사슬 소리(음향 효과?)가 너무 리얼해서 그것두 인상적이었다. 총체적으로 참 처절한 분위기..

양산백이 처형 당하기 전날 밤, 창문에 나부끼는 나뭇잎 그림자(LED 화면)를 배경으로 양산백과 축영대가 마지막으로 절절한 사랑을 노래하던 '심장(心腸)'이란 이별 노래는 공연 보러 가기 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뭐 이리 처량 맞은 노래가 다 있나' 싶었는데, 막상 라이브로 들으니까 살짝 감동적이었다. 여주인공(딩베이베이/丁蓓蓓)은 물론이거니와 남자 주인공(리레이/李磊)의 후반부 깨끗하고 낭랑한 고음 처리가 참 인상적인 곡이었는데, 중국 배우들 가창력은 확실히 뛰어난 것 같았다. 기본 플롯이 좀 약한 듯한 뮤지컬이었음에도, 배우들의 느낌 살린 애절한 곡으로 보는(듣는) 이로 하여금 삘 오게 만들었으니..
 
그리고, 중국어 노래는 프랑스어의 경우처럼 '노래에 대한 어감' 자체가 참 좋다. 노래 가사(대본)의 그 탁월한 '시적임'은 프랑스 뮤지컬이나 중국 뮤지컬이나 막상막하인 것 같은데, 동양 고대 문명의 2대 산맥 중 하나인 중국 쪽이 한 수 위인 것 같기도... 중국 뮤지컬 <디에>자막을 보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극강 시적임을 자랑하면서 언어의 묘미를 최대한 살린 그 함축적인 노래 가사에 살짝 현기증이 날 뻔도 했는데, 이 뮤지컬은 가사(배우들의 대사)가 정말 문학적이다.

이 뮤지컬 <디에(蝶)-버터플라이즈>의 2막 한 대목에서.. 나비 인간의 저주를 풀기 위해 인간과 결혼해야 하는 축영대를 데리고 도망갔다가 체포 당한 남자 주인공 '양산백'이 양 사이드(양 손)를 밧줄에 묶인 채로 맞으면서 고통스러워하는 장면은 <노트르담 드 파리> 2막에서의 '에스메랄다 발 고문 장면'을 떠올리게도 하는 대목이었는데, 연출은 <디에> 쪽이 훨씬 나아 보였다.

진정한 카타르시스는 극강의 처절함에서 온다 : 어설프게 불쌍한 주인공은 No!

<노트르담 드 파리> '에스메랄다 고문씬'에서, 원래 프랑스 오리지널 버전(98년 DVD)의 엘렌 세가라(에스메랄다 역)가 보여준 그 느낌, 그 연출이 딱 좋았었는데.. 그 뮤지컬 초연 이후엔 그 장면이 다르게 바뀌어 버렸다. 그래서 <노트르담 드 파리> 내한 공연(2005~2006년) 때와 최근 한국어 버전 공연에선 그 장면이 '에스메랄다가 밧줄에 묶인 채 소도 때려잡을 기세로 거칠게 반항하면서, 또 무지막지하게 인상 찌푸리며 사납게 몸부림 치는 설정'으로 연출되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연출은 별로다.(바뀐 연출의 그 장면은 볼 때마다 느낌이 너무 안 좋았던, 작품의 미학적인 요소를 많이 해치는 분위기..)

프롤로의 계략으로 억울하게 옥에 갇히고, 나중에 죽음까지 맞게 되는 가련한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를 그런 식으로 '거세고 사나운 여자'의 느낌으로 표현하기 보다는 98' 오리지널 버전에서처럼 어쩔 수 없는 운명의 굴레에 고통스러워하면서 온 몸에 처연함이 막 흘러 넘치는..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는 여주인공 에스메랄다는 가련한 희생양~' 같은 느낌의 연출로, 다소 처절한 분위기로 가는 게 좋았다고 생각한다.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Notre-Dame de Paris)> 때와 연출한 사람은 동일한데, 옥에 갇힌 뒤 주인공이 고초를 겪는 장면이나 죽음 장면은 중국 뮤지컬 <디에(蝶)> 쪽이 훨씬 그럴 듯하게 잘 빠진 것 같았다. 또한 같은 '처형'은 처형인데, 에스메랄다의 '교수형' 보다는 양산백의 '화형식'이 훨씬 더 극적이고 처절하게 느껴졌다. 그것이 실제라 생각하면 둘 다 끔찍한 장면이지만 '화형' 쪽이 더 많은 고통을 수반하는 끔찍한 처형이어서, 그만큼 그 비장감과 처절함도 배가되는 것 같았다. 

온몸의 오감을 자극하던 웅장하고도 비장한 기운, 그 인상적인 경험~

뮤지컬 <디에>에서 그 때 흐르던 비장한 분위기의 음악과 웅장한 대형 무대 & 세트, 비주얼적인 느낌을 극대화 한 LED 화면의 특수 효과로 그 장면이 꽤 멋지게 연출되었다. 단상 위에 서 있던 남자 주인공의 화형식이 거행되면서 이내 양산백의 몸에 (화면 효과로) 불길이 쏫아 오르고, 여주인공 축영대도 갑자기 그 불길에 몸을 던져 둘이 하나가 되고...

화형식 이후엔 양산백과 축영대가 '나비'가 되어 날아 오르면서 '죽음'으로 사랑을 이루게 된다는 결말인데, 극 후반부에서의 이런 식의 연출은 가마 타고 시집가던 축영대가 급작스럽고 작위적인 비바람 속에 무덤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영화 <양축>에서의 설정 보다는 이 뮤지컬 쪽 설정이 훨씬 느낌이 좋았다. 이성으로 느끼는 스토리의 흐름을 떠나, 온 몸의 감각을 자극하는 부분에서 뭔가.. 삘이 왔다고나 할까-

예전에는 순수 문학 하던 사람이 드라마도 쓰고 해서 우리 나라 TV 드라마 속에서도 종종 소설같은 느낌의 처절한 분위기의 작품을 볼 수 있었는데, 요즘 TV 드라마는 죄다 가벼운 분위기의 드라마들이 많다. 그래서 난, 한동안 처절한 분위기의 작품에 목이 말랐나 보다. 전체적으로 되게 좋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지난 번에 보고 온 중국 뮤지컬 <디에(蝶)> 후반부에서 그 웅장하면서도 '처절한 느낌'과 묵직한 '비장감'이 감돌던 양산백 처형식 장면의 극 분위기 만큼은 참 인상적이었다..